파리의 플로리스트로 첫 인턴을 시작하던 날
파리에 온 지 두 달째, 생각보다 빨리 인턴 자리를 구했다.
생산활동이 끊긴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단돈 몇백 유로라도 용돈벌이를 하면 좋겠다 싶었기도 했고.
어학원 수업이 끝난 오후에 도서관으로 달려가긴 했지만 그러기엔 파리는 날씨가 너무 좋았고.
나이 어린 동생들 틈에서 수험생처럼 공부를 할 것 같진 않았다.
일본에서부터 메일을 통해서 인턴 자리를 확인하고 온 꽃집이었지만 오자마자 인사를 드리러 간 그곳은 이미 여러 명의 인턴으로 자리가 없었고. 언제 인턴 자리가 다시 날 지는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간절한 눈빛이 통했던지 대기자(?) 1순위로 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연락을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간절함으로 치면 누구보다 컸지만, 당시의 나는 조건 상으로 몇백 유로를 줘가며 고용한들 샵에 아주 득이 될 인재는 아니었다.
불어를 시작한 지 고작 몇 개월, 꽃 경험은 일본에서 받아온 디플롬 한 장, 원예학 용어 지식 제로.
프랑스인들을 상대로 한 아르바이트 경험 무.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기에 사람 좋은 얼굴을 하고 인사를 다녀간 날 할 수 있는 어필은 다 했다.
결국 꽃도 손님 장사의 일부니까. 장사하는 사람들은 말 몇 마디 나눠보면 '이 사람 장사 좀 하겠다 vs 못하겠다' 대략적인 사이즈가 나온다는 걸 오랜 아르바이트와 직장생활로 경험한 바, 그 점을 가장 어필했다.
언어는 배우면 늘고, 부케도 만들다 보면 손에 익혀질 테고, 원예학도 자주 쓰는 용어들을 달달 외우면 되는 거라고 치자. 그러나, 장사 잘하는 '눈치'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기술이니까.
나 어떻게든 내가 받는 월급 배로 벌어 줄게. 하는 기를 뿜어냈고 그 후로 한 달 뒤 공석이 생겼으니 출근해도 좋다는 연락을 받았다.
와우.
내가 파리에서, 일을 시작하다니!
그것도 그렇게 바라던 파리의 플로리스트로.
아직 플로리스트라는 명함을 내밀기엔 턱없는 실력이었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이미 내 이름을 건 샵을 낸 것 마냥 기쁜 날이었다.
몽파르나스를 지나는 6호선의 'Edgar quinet' 역 앞에 위치한 자그마하지만 앤틱 한 가구와 소품들 사이로 사장님의 콘셉트와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는 샵.
파리의 첫 샵으로 이곳에서 꽃일을 시작한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장님은 파리 1세대 플로리스트로 은퇴할 나이가 훨씬 지났음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샵에서 꽃을 만지시는 현역 플로리스트이자 일본에서 잡지와 미디어를 통해 꽤나 이름이 알려지신 분이라 이미 많은 일본인 플로리스트들이 이 샵을 거쳐갔다.
그 덕에 나 역시 일본에서 꽃을 배운 선생님 인맥으로 한 다리 건너 샵에 지원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도 했고 그 사실이 어쩌면 날 유학까지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다.
인턴 어떻게 시작했어?
파리에서 인턴을 하려면 'Convention de Stage'라고 하는 인턴 지원서 같은 서류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인턴 고용 계약서'인데 서류는 보통 사립 어학원에서 발급을 받을 수 있고(외국인의 경우) 서류 한 장당 최대 3개월의 인턴 계약이 가능하다.
물론 주 35시간 노동을 기준으로 나라에서 지정한 인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일손을 많이 필요로 하는 꽃집에서는 이 시스템으로 예비 플로리스트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 외에 지인의 경험을 빌리자면, 사진과 주얼리 등의 다른 직군에서도 회사에 따라서는 이 서류로 인턴을 채용하는 회사들이 꽤 있다)
그리하여 불어를 시작한 두 달이 넘은 시점부터 약 반년 간 이 샵에서 인턴으로 지냈다.
말이 7시간 노동이지 익숙하지 않은 불어와 처음 해 보는 꽃 일 앞에서 나의 모든 신경은 14시간을 일하는 것과 같은 노동의 피로를 느꼈고 취침 전 책상에 앉아 과제라도 할라 치면 펜을 놓치고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체력의 한계.
30대 만학도의 한계를 동시에 느끼는 시기였다.
하루에 적어도 한번 정도 부케 배달을 직접 했다.
그 당시의 우리 샵에는 인턴생이 나를 포함 세명이었다. 직원 두 명 그리고 꽃 학교를 다니는 수습생 한 명, 사장님과 사모님이 계셨다. 아담한 샵이었지만 오랜 기간 동안 이 근방에서 샵을 운영해오시던 분이라 단골들도 꽤 있었다. 일본에서 꽃을 배우러 오는 학생들의 레슨을 비롯, 온라인 주문도 받고 있어서 매출이 나름 괜찮은 곳이었다. 배달비 절감을 위해 배달기사를 쓰지 않고 인턴들이 돌아가면서 배달을 직접 했는데, 다른 인턴생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난 나름 그 시간들이 좋았다.
파리 곳곳을 여행하는 기분으로 매일 새로운 고객의 집 문을 두드렸다.
전철을 타고 파리 곳곳을 누비며 여행으로는 느끼지 못했던 파리의 매력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어떤 날은 생일을 맞으신 7구의 오래되면서도 고풍스러운 오스만 건물에 사시는 노부부의 집으로, 갓 출산을 하신 파리지엔의 집으로, 또 어떤 날은 출장으로 혼자서 생일을 맞아야 하는 그녀를 위해 호텔로 꽃 배달을 하신 이태리 남자 친구분의 부탁으로, 사연을 담아서 꽃을 배달하는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큐피드의 임무를 완수하는 마냥 행복했다.
분명 여기인데 하고 맵을 보며 이웃 가게에 물어도 보고도 막힐 때, 분명 알려주신 출입 코드가 맞는데 안 먹힐 때, 집 앞까지 갔는데 고객이 안 계실 때면 떨리는 손으로 고객의 전화번호를 눌러야 했던 그 시간 빼곤 말이다.
'봉쥬르 마담, 무슈, 플로리스트입니다만 지금 어디 계신가요? 제가 집 앞까지 왔는데요..'
'혹시 말씀하신 4층 건물 왼쪽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왼쪽인가요. 그럼 몇 번째 문이죠, 문에 이름이 안 적혀 있어요'
'첫 번째 대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정원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건물 중 A 건물 앞에 왔는데, 코드가 안 맞아요. 이 건물이 맞을까요?'
하면서 불어를 또박또박 해도, 능청스럽게 해도 떨리긴 매 한 가지였다.
눈을 보고 말해도 어려운 외국어는 전화로는 더 어려운 법.
온 신경과 정신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을 해도 나이 때별로, 혹은 말투마다 뱉어내시는 불어가 다 다르게 느껴지는 건 불어 초짜라 어쩔 수 없었던 넘어야 할 관문이었다.
아, 간혹 본인 말만 빨리 하고 끊으시는 파리지앵, 파리지엔들도 계셨으니까.
그럼 머릿속에서 흩어진 말들을 열심히 조합해 추리를 시작하곤 했다. (하하.. 꽃 배달 미션은 그다음이었다)
지금이야 전화로 부동산, 은행, 무례한 고객에게도 당당히 할 말을 전하고 따져야 직성이 풀릴 만큼의 배짱이 생겨버린 세월을 보냈지만 그 당시를 떠올리면 피식하고 잔웃음이 나올 만큼 그때 파리를 보던 나의 시선은 모든 게 신기하고 아름다웠구나 싶다.
모든 일은 ’ 삼육구 법칙’이 적용되는 법.
삼 개월이 지나자, 어려웠던 전화도 어느 정도 능숙해졌고 샵에서 고객을 대하는 법도 그리고 부케를 잡는 법도 어느 정도 수월해졌다.
물론 여전히 까다로운 고객 입맛에 맞게, 그러나 티 나지 않게 내 위주로 끌고 가는 법(추천하는 꽃들을 모두 마다하고 본인이 고른 꽃으로 부케를 만들고 싶다는 고집을 부리는 고객들 중 대 다수는 플로리스트가 추천한 꽃으로 선택하기에) 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제 겨우 날개 달 곳을 만들었을 뿐, 날개도 그리고 나는 법도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까.
삼을 떼었으니, 육 개월 그리고 구 개월.
그 후 3년, 6년 9년을 더 보내며 충분히 익힐 수 있는 문제였다.
시작이 반이었던 그 시절로부터 3년이 넘는 세월을 더 보냈다.
그 꽃집은 첫 한국인 인턴이었던 나를 시작으로 현재는 많은 한국인 인턴과 견습생들이 지나갔고 프랑스인들과 일본인들 위주로 일을 하시던 사장님은 현재 한국인 학생들과도 함께 작업하신다.
그 시절 함께 파리의 낮과 밤을 보내던, 일본인 플로리스트들은 나의 소중한 꽃 인연으로 각각 아담하지만 개성 넘치는 파리의 플라워 샵의 책임자로 파리의 세월을 살고 있다.
이때의 꽃 인연을 시작으로 나는 본격적으로 꽃을 공부하고자 결심하고 서른의 도전을 꿈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