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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Oct 29. 2019

나는, 파리의 플로리스트입니다.

두 번의 이민, 두 번째 직업. 플로리스트

나는 무인도에서도 살 사람이라고 했다.

타고난 사주처럼. '삶에 대한 열정과 의욕이 강하며 도전하고 변화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좋은 말은 20대에 다 끌어다 쓴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30대가 되어서도 써먹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쥐어진 두 개의 디플롬과 두 개의 국가자격증


서른에 파리를 만나, 살던 일본을 정리하고 프랑스로 넘어와 인생에 생각도 못한 불어를 시작했다.

6개월 정도만 예정했던 유학은 만학도의 열정에 탄력을 받아 몇 년 동안 이어졌고 그 사이 두 개의 플로리스트 학교를 졸업하며 두 개의 디플롬을 손에 넣고, 두 개의 프랑스 플로리스트 국가 자격증을 취득했다.


처음부터 큰 목표를 잡고 왔다면 해내지 못했을 결과물이다.

하나씩 밟아 올라가니 또 다음 목표가 보였고 그렇게 걸어와 뒤를 돌아보니 파리의 플로리스트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학기를 마치기 전에 일하던 샵에서 운이 좋게 직원 계약을 했고 비자 서포트를 받았다. 

그리고 올 해 무난히 4년 짜리 비자를 갱신했다.  

                  

에펠을 배경으로 촬영한 여름을 닮은 색의 부케 @2018



프랑스는 플로리스트를 포함하여 제빵사, 헤어디자이너 등 손으로 하는 기술직은 기술 자격증을 취득해야 취업에 유리하다. 일반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를 졸업하여 국가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기술을 배우는 시스템이다.

그러니 일반 대학에서 학사를 밟을 건지, 전문학교에 진학하여 기술직으로 갈 건지를 정하는 시기가 우리나라보다 빠른 10대 때 결정이 된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진학을 결정하게 되니 20대가 되면 이미 경력 몇 년 차 기술자가 된다.

조금 더 빨리 이런 제도를 알았다면 나의 고생이 조금 더 수월했거나 기간이 단축되었을지도 모르지만 만학도라 감내할 수 있었던 인고의 끝에 얻은 열매였기에 그 성취감은 또 다음 도전을 부르기에 충분했다.



고성 촬영을 위한 신부 부케


디플롬과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다 취업비자가 승인되는 해피엔딩이면 얼마나 좋을까.

자국민의 실업률이 높아 외국인 고용 심사는 생각보다 엄격하다. 외국인을 고용하기 위한 서류는 까다롭기 그지없고 고용주가 매달 내야 할 외국인 고용 세금을 비롯하여 첫 비자수령 시 사장이 부담해야 할 세금 또한 한 달 월급에 가까운 금액이다. 굳이 이런 리스크를 감수 해 가며 고용해 줄 고용주를 찾는 건 노력만큼 운이 많이 따른다.


외국인 고용의 전례가 있는 대기업이야 수월하겠지만 레스토랑이나 헤어디자이너, 플로리스트 같은 기술직의 비자는 이러한 문제들로 고용주와의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 중에는 조건부 계약을 한다거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여 비자를 진행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이민자의 나라이고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지만 그 한 끗 차이의 선을 넘기 위한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나라는 아니었다.



꽃이 들어오는 날의 평일 아침 풍경
낭만을 논하는 외국인 노동자


어학을 하던 시절 처음 인턴을 시작했던 14구의 플라워 샵을 시작으로 근 오 년 동안 수많은 파리의 플라워 샵에서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일 년이 넘도록 일을 했다.  그 중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운영하였던 샵에서 한국인들의 수업 통역과 어시스턴트를 담당하면서 많은 한국인 플로리스트과 인연을 맺었다.

그때 많이 받은 질문은 그랬다.


파리에서 꽃이라니! 너무 낭만적이네요.
여기서 하는 꽃일은 더 아름답고 우아할 것 같아요.
파리는 꽃을 사는 사람들이 많아서 일 할 말이 나겠어요.


같은 업을 하는 사람들끼리 아는 우아함 뒤의 노동력과 새벽 기상 등의 고충은 뒤로 하고, 파리를 떠 올리는 것 자체로도 낭만적인데 꽃이 추가되면 당연히 우아함이 더 붙을 수밖에 없는 반응에 나는 때론 그들의 낭만을 보호해 주고 싶어, '우아함으로 포장된 외국인 노동자'라는 뒷 이야기는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러나 일본에 살때도 외국인 노동자(이하 외노자)였다면, 매일을 오랜 역사가 깃든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꽃을 만지며 생활하는 파리 외노자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낭만이 담겨 있는 건 사실이다.

'헝지스'라고 하는 파리의 꽃시장 규모는 서울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웅장한 만큼 새벽 꽃시장을 가는 일은 고단하지만 신선한 꽃과 식물을 만나는 흥분되는 일이다.


홈파티 문화가 만연하게 자리 잡은 프랑스 사람들은 초대한 사람도, 받은 사람도 꽃을 사는 게 자연스럽다.

다양한 계절꽃에 홈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본인을 위한 꽃 소비를 하는 일. 누군가를 위해 소소한 행복을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각종 이벤트의 장식으로 프랑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꽃과 함께 일상을 살아간다.


그 중심에 우리의 존재가 있는 것이다.


15구. 로댕 미술관의 정원 @2014


1세대 프랑스 플로리스트들은 플라워 스쿨의 디플롬 없이 자연스레 꽃과 함께 자라며 플로리스트의 꿈을 이루고 샵을 운영해 왔다고 한다.

몇백 년 전부터 정원을 가꾸는 문화를 시작으로 집 화단을 그리고 도시 계획에서 꽃은 늘 함께 였다.

그리고 그다음 세대, 다음다음 세대로 이어져 지금과 같은 시스템으로 체계적인 교육과 함께 플로리스트를 양성해 오고 있으며 현재는 20대, 30대의 젊은 피들의 다양한 스타일의 샵들이 생겨나고 있다.


여러 가지 홍보 매체가 생겨나면서 그들의 활동 스타일과 영역도 다양해지고 있다.

그 덕에 프렌치 플라워의 세대 변화에 살고 있는 것 또한 행운일지 모른다.


은퇴할 나이에도 플로리스트의 거장으로써 자리를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는 프랑스 플로리스트를 시작으로,

콩쿠르와 레슨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분들, 그리고 본인만의 스타일로 파리 플라워샵으로 몇십 년씩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샵들까지. 클래식한 스타일부터 개성이 넘치는 샵들까지 그 스타일과 규모는 제각각이다.


앞으로 어떻게 파리의 샵들이 그리고 그 스타일이 변화를 이뤄갈지 기대가 된다.

파리의 플로리스트로써 그리고 한국과 일본 프랑스, 삼국의 꽃 문화를 경험하며 그 조화를 내 안에 잘 녹여가고 싶은 플로리스트로써 이 도시에서 피어나는 꽃 같은 변화를 가까이에서 소중하게 담아 가고 싶다.



클레마티스와 라넌 큘러스 얼굴을 살린 어레인지 (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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