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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Nov 12. 2019

여행자에서 이방인으로

그 심심한 차이를 받아들이면 낭만이 보인다

나도 딱 파리 한 달 살기 하면  좋겠다.


파리가 가장 예쁠 초여름에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에 자리를 잡아서, 이방인이 아닌 여행자라 느낄 수 있는 파리의 아름다움만 기억하고 살면 좋겠다.


한 달 동안 살 동네는 내가 어학 하던 시절에 좋아하던 5구나, 6 구면 좋겠다.  그러니까 애정 하는 뤽상부르 공원이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마레 지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오래된 아파트들이 많아서 사는 건 꺼려진다.

요즘 자주 가는 젊은 감성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모여 있는 9구와 10 구도 나쁘진 않겠지만 저녁엔 너무 북적거려 혼자 한 달 살기를 하는 내가 왠지 외로울 것 같다.


파리 중심 샤틀레의 한 카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늘 그랬듯,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킨다.

그리고 좋아하는 커피 공방에서 사 온 원두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가볍게 먹을 아침을 준비한다.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아낌없이 먹어둬야 하는 리스트에는 해마다 상을 받은 빵집들로 가득하고 그곳에서 사 온 바게트는 저녁에 파스타 소스와 함께,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크로와상은 아침에 갓 내린 커피와 함께 버터를 발라낸 후 좋아하는 무화과 잼을 살짝 얹어 먹는다.


한 달 살기를 하는 평일과 주말은 내게 경계 없는 시간의 흐름 같지만, 주말이면 파리지앵들과 같은 리듬으로 지내면 좋을 것 같다. 집에서 가장 가까운 장터를 체크해 뒀다가 적당한 에코백을 하나 메고 장을 보러 나가 시장의 사람 사는 냄새를 맡으며 나열된 야채와 과일 중 가장 신선해 보이는 아이들로 골라 담고, 그 옆의 치즈가게에서 바게트에 발라먹으면 좋을 브리(fromage brie) 치즈를 하나 고른다.

그리곤 늘 그랬듯 발길을 멈추게 만드는 꽃들이 가득한 매대에서 좋아하는 계절 꽃을 고른다. 초 여름이면 아직 작약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향기 가득한 로즈 피아제 한 다발에 적당히 향기를 돋우는 유칼립투스를 함께 화병에 꽂아두면 한 달 뒤 퇴실할 때 드라이플라워로 남겨둘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매주 다양하게 바뀌는 꽃을 고르는 재미를 발견하고 싶다.



에펠을 만나는 날이면 ' 내가 파리에 살고 있구나' 하고 새삼 느낀다 @피크닉 2019


좋아하는 요리들로만 해서 먹으면 좋겠다.


중고서점에서 산 프랑스 요리 서적을 뒤적거려 영화 '줄리앤 줄리아'의 주인공처럼 하루 1 레시피를 만들어 먹으면 어떨까. 디저트는 달달한 샤도네 화이트 와인이나, 여름에 어울리는 시원한 로제 와인에 크로와상을 살 때 곁들여 하나씩 집어온 그 빵집만의 시그니처 디저트와 함께 하면 더할 나위 없을 거다.

서머타임이 시작된 초여름의 해는 아주 늦게 질 테니 한 달 살기를 할 때 꼭 고려할 사항 중 하나는 작은 발코니가 있는 집에 살아보는 거다.

해가 적당히 드는 아침엔 커피 한잔을, 오후엔 읽을거리와 볼거리를 하나 집어 들고 사람 구경을 하며 파리의 낭만을 엿보면 좋을 테고 저녁엔 지인이 소개해 준 파리 사는 친구를 초대해 요리를 해 먹어도 좋겠다.


파리를 동경하는 누구에게든 파리에서 한 달 살아보고 싶은 이유를 묻는다면 수도 없이 많을 거다.


낭만과 여유가 가득한 이토록 매력적인 도시에서 싸구려 와인 한 잔이 다라고 해도 밤새 웃고 떠들 수 있을 것만 같다. 해가 적당히 드는 곳을 찾아다니며 나만 알고 싶은 파리 곳곳을 만들고 거리마다 풍겨 나오는 빵 냄새에 발걸음을 멈추고 매일 다른 디저트를 골라 맛보는 소소한 재미는 또 얼마나 황홀한지.


여름이 되면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따스한 볕 아래 선탠 하는 사람들


동네마다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공원들은 적당한 땀을 흘리며 뛰고 싶게 만든다. 그렇게 숨이 차오르기 직전까지 뛰다 마주하는 나무의 잎 사이로 삐져나오는 햇살 비치는 풍경은 내가 왜 파리까지 오게 된 건지 알려주는 것만 같다.

앞만 보며 달려오던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찰나, 그저 성실하게 주어진 일만 해 내면 잘해 나가고 있는 건 줄 알았던 그때 나는 파리의 여행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파리에서 한달만 살기는 아까워 기꺼이 이방인이 되어 보기로 했다. 



너는 파리 살아 좋겠다.


내가 무엇을 가장 잘할 수 있을지도 모른 채 그저 성실하게 일 하는 것처럼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살아내 나이를 먹으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뭐 다들 그렇게 사는 거잖아'하고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기를 반복하던 그때, 난 여행자에서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했다. 정답을 찾기 위해 떠나온 파리 살이는 아니겠지만 내게 조금의 시간과 쉼표를 주고 싶었다.

내가 사는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은 어떤 가치관과 방식으로 살고 있을까 보고 싶었다. 궁금했다.

삶에 있어 여유와 쉼표란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기다렸을 때 주어지기도 하지만 일상과 함께 공존할 수도 있구나. 그럴 때 가장 나다운 모습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음을 발견했다. 어쩌면 그 시간들을 통해 내 중심을 잡고 그 주변으로 가득 다른 이들이 바라는 모습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으로 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햇살 좋은 날의 파리는 눈부시다


 일본에서 프랑스로. 10여 년째 여행자가 아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지금, 한 달 살기에서만 가질 수 있는 여유와 낭만은 현실에는 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파리를 여행만 하고 끝났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짝사랑의 존재로 늘 다시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으로 기억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파리의 숨겨진 진짜 얼굴들을 다 맛본 이방인이 된 지금 파리가 짝사랑이 아닌 애증의 관계라 더 좋다.


외국인이라 겪는 작은 보금자리 하나 구하는 어려움부터, 비자를 갱신할 때면 늘 행정국의 갑질에 마음 졸이기 일쑤여도 살아보길 잘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만큼 늘지 않는 어학으로 불리한 일을 당할 때면 오기가 생겨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싸움닭이 되기도 하지만 쌓여진 경험들이 기특하다. 이방인이라 가질 수 있는 서러움도 애환도 적당한 능글맞음도 이 모두 나를 단단하게 해 주는 요소라는걸 안다.

 

프랑스는 평등, 자유, 우애의 나라 (egalite, liberte, fraternite)를 강조하는 나라인만큼 표면적으로는 이방인이 살아가기에 썩 나쁘지 않다. 독특한 프랑스 문화와 '파리'라는 도시가 가지는 다양성과 이질감의 차이를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파리를 막론하고 여행자가 아닌 이방인의 시선으로 살아갈 때 존재하는 이질감과 퍽퍽한 현실감은 결국 내 안에서 어떻게 공존하는 방식을 찾아내느냐에 좌우되기도 하니까.

막연한 환상과 낭만의 원더랜드는 세상 어디에도 없지만 내가 만들어가는 나만의 원더랜드는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이방인으로, 때론 여행자처럼 살아봄으로써 발견한다.


파리의 여름밤


파리 살아서 좋은 게 아니고, 파리에 사는 내가 좋아.

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 여행자라면 절대 겪지 못했을 이방인의 삶을 지나오면서 나는 이제 그 어디에서 다시 시작하더라도 단단해진 나만의 방법으로 낭만을 꺼내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의 삶은 고단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낭만은 존재하고 그 낭만을 쥐고 펼 수 있는 건 결국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그렇게 파리지엔인 지금도, 그리고 파리를 떠나는 순간이 온다 해도 계속해서 일상의 낭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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