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옆에서 웃고 있는 그녀는
대학생 때 신간 서적을 뒤적이다 참신하면서도 발칙한 '두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스토리에 빠져 한참을 읽은 적이 있다.
소설 '아내가 결혼했다.'
일처 다부제가 가능해? 보다, 내게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게 가능한가? 가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스토리.
난 그때까지도 (지금도 변함은 없다) 사랑은 한 사람 하고만 정직하게 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
양다리와 바람이 수많은 우리들의 연애사에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정확하게 인지하지도, 겪어보지도 못했다.
연애에 공백기가 없었다고 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갈아타기' 신공일지도 모른다.
놓칠 수 없는 버스를 눈 앞에 두고 급하게 벨을 눌러 '기사님, 저 여기서 좀 세워주세요!'라고 잡아 세워
다음 버스에 올라탄다.
정류장에서의 대기 시간 없이 갈아탄 버스의 희열 덕에 '정해진 정류장에서만 정차합니다'의 기사님의 정신을 배려할 여유 따윈 없다.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갈아타는 것.
각 1인분에 대한 사랑의 크기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어느 한 시점에서는 두 사람을 함께 담아야 가능한 일이다.
그는 갈아타기 신공도 아니었고, 양다리를 할 깜냥도 못 되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반년 정도 솔로였다고 했다.
석사를 끝내느라 정신이 없었고 이제 막 원하는 곳으로 재 취업을 한 시점이었다.
그 시기를 바쁘게 사느라 혼자가 편했고 이제는 안정된 생활에 안정된 연애를 할 만큼의 심적 여유가 생긴 거다.
첫 데이트에서 많은 대화를 했다.
우리의 대화 속에서 나는 그가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결국은 헤어진 전 여자 친구 이야기를 살짝 엿들을 수 있었다. '과거는 묻지도 답하지도 말라'는 원칙은 깨지 않았지만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레 나온 레퍼토리의 결론은 '본인이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인연은 거기까지였을거다'로 지어졌다.
지나간 사랑은 과거로 묻어두고 미래를 그리는 남자구나.
사랑에 최선을 다 해봤고 아파도 본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사랑이었다.
우리가 이별을 말하고 몇 개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잘 지내려 애썼다.
사람도 만나고, 여행도 다녀오고, 운동으로 땀도 많이 흘렸다.
무엇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다시 혼자된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는 여전히 마음 한편에서 자존감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매력이 없는 사람이었나.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참 많았는데.
사랑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상이 참 행복했는데, 하루아침에 일상에 먹구름이 꼈다.
헤어지기 전에, 겨울이 되면 크리스마스 마켓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에 가자고 약속했었다.
차라리 그렇게 빨리 겨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리로는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아직 그를, 그와 함께 하고팠던 겨울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매일 어느 시간마다 떠올랐던 그가, 한 달에 한번 즈음 어쩌다 떠오르게 되고.
이제는 그의 이름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던 어느 날.
카톡 친구들 목록을 스윽 보다 이게 누구지? 하며 보게 된 그의 카톡 프로필.
이름은 분명 그가 맞는데, 내가 모르던 표정의 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어디서 본 듯한 여자가 그와 함께 참으로 닮은 표정으로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그랬다.
그의 전 여자 친구였다.
나를 만나기 전, 만났다던 전 여자 친구.
그녀와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내 친구가 그와 한창 잘 만날 때 즈음 넌지시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A가 아직도 그를 못 잊나 봐. 그를 암시하는 듯한 사진과 글들을 요즘 자꾸 올리더라.'
그가 이별을 고했던 만남이었고, 내게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기에 보낸 인연이라 했었다.
그래서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설사 그녀가 반년이 넘게 지난 시점에서 후회해 매달린다고 해도, 그에게는 내 존재가 확실할 거라 믿었다.
나의 상상 속 시나리오는 현실이 되었다.
그녀가 붙잡았고, 그는 흔들렸다.
동시에 두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시점에서 그는 누구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한번 이별한 인연은 같은 이유로 이별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는 수두룩 하지만 인연이라면 다시 만나서 더 굳건해지는 경우도 있다.
사진을 보는 순간, '하..' 하고 짧은 육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피식 웃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네가 그렇게 급하게 떠났구나.
참 너란 사람도 멋이 없다 싶다.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면, 그게 운명인가 싶으면 떠나갈 수도 있다.
마음이란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래도 이별에 예의가 없었던 건 나빴다.
아니 어차피 우린 장거리였으니 어쩌면 양다리도 가능했을법한 상황에 차라리 이별을 고해서 고마워야 해야 하는 건가.
그는 역시 내 예상대로 그럴 깜냥이 안되었다.
말없이 하루아침에 떠나는 그 방법이 내게 상처를 덜 주는 최선의 선택지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이유였으면 나 혼자 애썼던 시간들이 조금은 짧아졌을지도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난 그 시간 동안 날 잘 사랑해준 만큼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와 그녀의 사진을 보고도 피식 웃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 편으로는 좋은 사람을 알아간다는 게 이렇게도 어려운 일인가 싶다.
내려야 할 정류장에서 내렸으면 좋았을 것을.
급하게 다음 버스를 향해 떠난 사람.
내게는 참 멋이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겠지만 그녀에게만큼은 다시 잡은, 그래서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되길 바라본다.
이별을 대하는 자세는 어렵지 않다.
내가 더 사랑했든 덜 사랑했든 함께 조금의 추억을 나눴던 상대를 배려해야 하는 건 사랑, 그리고 사람에 대한 도리다.
세상은 생각보다 작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인연들로 얽혀 있다.
그 만남이 마지막 같아 보여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시작보다 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거절에도 예의는 필요하고, 그래서 이별에는 마침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