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드모아젤 Feb 08. 2019

이별에도 마침표가 필요해 #3

전화 한 통으로 사랑이 끝났다.

차여본 횟수보다 내가 떠나온 횟수가 더 많았다는 둥의 어릴 적의 연애담이 유치한 자랑거리가 될 때가 있었다.

그 어릴 적의 연애담 속에서 누군가에게 이별을 고할 때는 '우린 잘 안 맞는 거 같아.' 그러니 이쯤에서. 식의 이별 통보로 단합되었을 거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이유엔 디테일이 껴 있지 않았다. 이미 마음이 떠났으니  디테일을 붙이는 게 더 이상했다.

즉 그런 류의 이별은 마음보다 머리가 시켜서 '우린 여기까지'라고 쿨하게 선을 정해준 이별이다.


어릴 적 사랑을 알아가기 위한 시행착오 중 하나였던, 사랑을 1도 모르는 소녀의 '그래도 난 이 사랑에 최선을 다 했다.'라고 착각했던 이별 방식 중 하나였다.


그리고 몇 번의 '사랑'이라 칭할 수 있는 마법을 겪으며 누가 먼저 사랑을 고하든, 이별을 고하든 '어느 쪽이 먼저'라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먼저 시작한 이 사랑이 얼마나 예쁠지 너에게도 보여주고 싶을 때, 우리가 함께 시작한 이 사랑의 끝이 희미해져 더 이상 그림이 그려지지 않을 때,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그저 내게, 당신에게 있어 최선인지가 중요할 뿐.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했던 사랑은 쉽사리 끝내지 못한다.

상대가 다칠까, 혹시나 깨질까 염려하는 내 마음만큼 상대도 같이 아플까봐 말이다.





'오늘 하루 잘 보냈어? 그래 오늘 저녁엔 통화 하자'

어제와 달리 그가 퇴근 후 바로 연락을 해 왔다.


그가 동굴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평상시처럼 나의 하루를 사진 한 장과 함께 설명해 보내 놨더니 그에 대한 답장도 잊지 않고 덧 붙여서 말이다. (그래, 사랑은 원래 찌질하다)

평상시 우리의 대화 다웠다.


장거리 연애에서 '보고[報告, report]'가 미치는 범위와 역할은 크다.

횟수가 빈번하지 않더라도 단 한 번의 연락이라도 진심을 담으면 된다.


꾸준한 연락이 쌓여 우리의 거리와 시차를 무색하게 할 만큼의 믿음을 만든다.

함께 쌓아갈 추억과 공유할 일상이 다른 커플에 비해 적기 때문에 나의 일상을 잘 보고 하고 그의 일상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것. 장거리 연애에선 중요한 포인트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대화'같은 분위기에 일단락 안심을 한다.

아니 어쩌면 이틀 동안 격하게 흔들렸던 내 마음의 소용돌이가 이제 겨우 안정이 되었다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 소용돌이에 배가 흔들리는 건 당연할 테고 물에 잠겼다 구조가 될 것인지, 혹은 두 동강이가 나 바닷속으로 잠길 것인가만 남겨둔 상황에 최악의 스토리가 나오더라도 받아 들일수 있는 마음의 구조대가 준비된 셈이다.


그가 어떤 말로 운을 띄우더라도 패닉을 맛본 날로부터 꼬박 하루가 지난 오늘이라 괜찮다, 이 말이다.



고요했던 스톡홀름의 겨울밤. 2019


그날 저녁 친구에게서 반가운 호출이 와서 망설였지만, 혹시나 오늘 그와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될 경우 나도 혼자인 게 싫을 것 같았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갔다.

그녀가 곱게 차려놓은 밥상을 클리어하고 와인 한잔 하며 수다를 떨고 나니 마음이 좀 홀가분하다.


원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법이라고, 서로의 연애담 충고는 또 기가 막히게 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 이제 실전이다.

중이 제 머리 깎을 시간이 온 거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달랐다.

이게 무섭다는 30대의 촉이 아닌가.  감이 왔다.

절대 그는 '헤어지자. 그만하자. 우린 여기까지' 등의 흔한 이별 레퍼토리를 쓰지 않을 거다.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 '헌신한 여자에게 상처를 준, 이 사랑을 깬 나쁜 놈' 이 될 테니까.

이왕 헌신해서 헌신짝 될 거, 나는 스스로 마지막 역할도 담당하기로 했다.


내가 먼저 운을 띄우니 그가 대답을 이어간다.

그는 공식적 동굴에 들어가지 않았지만 지금 있는 이 곳을 동굴이라 생각한 듯하다.

'할 말'이라는 건 결국 '이별'로 이어졌으나, 디테일이 없다.

사랑을 시작하는데 이유가 없듯이 헤어짐에도 이유를 정확히 세울 수 없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언성을 높이지도, 울부짖지도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나는 그의 결정이 최선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말은 이미 뱉어졌기에 번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번복하겠다고 한다면 내가 싫다고 할 예정이었다.


물론 내가 매달릴 경우, 그가 다시 생각해보자고 할 순 있겠지만 난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미 그의 배려 없는 일차적 이별 통보에 믿음이 깨진 상태었다.

내가 믿고 함께 걸어갔으면 했던 그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쩌면 단순한 실수 같은 치부스러운 에피소드로 덮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이미 변명을 할 타이밍을 놓쳤으니 내겐 그게 실수가 아닌 의도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감라스탄 지구. 빈 의자 두개  @스톡홀름 2019


예고가 없기에 더 쓰라렸지만 예고 없는 이별은 내게 처음이 아니었다.

대게 그런 이별은 통보하는 쪽이 더 아플 때도 있다.

잠시 생각할 시간도 가지지 않고, 그게 최선인지 본인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현재의 감정이 식었다는 이유로 내 감정을 너로 인해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일종의 '사랑을 같이 했던 상대에 대한 배려' 보다 이젠 그 사랑이 필요 없어진 본인을 위한 이기적인 마음이 더 앞선 결정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 떠난 이의 빈자리는 시간이 지난 뒤 서서히 스며든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때의 본인의 선택은 과연 최선이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예전에는 이유를 찾고 싶어 했다.

내가 잘못한 게 있는지, 그리고 내가 더 노력하겠다고도 했다.

어디서 우리가 삐걱한 건지, 혹은 네가 삐걱한 건지.


그런데 그런 것들은 떠난 마음 앞에선 의미가 없다.

뱉어진 이별을 나 혼자 주워 담는 건 의미가 없다. 같이 주워 담아도 다시 예전처럼 서로를 바라볼 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나는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물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생긴 거냐고.

그런 이유를 대면 차라지 낫겠다 싶었다. 그를 잊을 명목이 조금 더 확실해질 테니까.

우리의 연애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 쌓아 올린 추억이 많이 없었기에 그가 내 진짜 매력을 못 찾았다고 치고, 나보다 더 매력이 있을 다른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헤어지는 마당에) 이유로 쳐 줄 셈이었다.


그게 핑계라면 난 그를 사양할 이유가 명확해진다. 사람을 알아보는데 꼭 긴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한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나를 잘 알면 상대를 잘 볼 수 있다고 믿는 나는 그가 나에게 맞는 사람이라고 자부했다.

완벽한 커플은 없다는걸 잘 알기에, 부족한 구석을 채워주며 서로에게 잘 맞춰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그 끈을 놓았다.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니라는 대답과 함께.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의 전화 한 통으로 사랑이 끝났다.


그리고 몇 개 월 뒤 알았다.

그때 그의 대답은 거짓말이었다는 걸.


매거진의 이전글 이별에도 마침표가 필요해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