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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Feb 02. 2019

이별에도 마침표가 필요해 #2

동굴로 들어가는 남자


이별 앞에서 더 마음의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쪽은 늘 더 사랑하는 쪽이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상대도 날 바라봐주고 있다고 착각하며 이 연인관계가 쭉 지속될 거라 생각하다 맞이하는 이별은 더 그러하다.


먼저 좋다고 고백한 것도, 나만 바라볼 것처럼 별이라도 따서 줄 것 같았던 그였더라 할지라도 이별의 순간에 내가 더 아픈 건,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그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다.






'미안해, 지금 룸메이트들이랑 뭘 좀 해 먹는다고 시간을 좀 늦춰야 할거 같아. 열 시 반 어때? 괜찮겠어?'

원래 대로 라면 23시에 잠자리에 드는 그인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늦게 요리를 한다고 한다.

핑계 같았지만, 속는 셈 치고 기다리기로 한다.


괜찮다. 그래, 난 오늘은 늦게 자도 괜찮다.

왜 인스타를 '차단' 했고, 그 내 심장을 쪼이게 하는 '할 말'이라는 걸 듣고 자면 되는 거니까.

그래야 잠이 올 테니까.



골목  @스톡홀름 2018


22시 30분.

그에게서 연락이 왔다.


씻고 곧 잠자리에 들어야 할거 같은데 오늘은 아무래도 이야기 하기 애매할 거 같다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What?

이건 분명 그는 내가 보살인 줄 알거나, 그 대단한 '할 말'을 갖고 밀당을 하거나.

아니면 이제는 내가 안중에 없거나이다.


화가 났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다려주는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상황이 이렇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나는 사랑을 받고 싶은 사람이지 보살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내 기분을 몰라주는 건 둘째치고 내가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이 정도라는 게 화가 났다.



처음으로 난 그가 배려가 없다고 느꼈다.

오늘 밤 안에 다 이야기해주지 못해도 괜찮다. 그는 내가 혼자 걱정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걸 몰랐음에 뱉은 말이었을지 모르지만 우린 이제 막 첫사랑을 시작한 사랑을 모르는 10대가 아니다.

어른들의 사랑을 해야 하는 나이에 그는 최대한 피하는 중인 거다.


이건 마치 ‘나 지금 동굴로 들어갈 테니 마음의 준비 좀 해. 아, 그리고 동굴 들어가면 전파 안 터지니까 속 좀 타더라도 이해해주고' 격이다.


이런 식으로 피하는 건 비겁했다.

그래도 이 시점에서 싸우긴 싫었다.

동굴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사람을 잡아선 내가 원하는 대답을,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들을 수가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그래 내일 다시 보고 이야기하자'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당연히 잠을 설쳤다.


다시 들어가 본 그의 인스타는 '차단'에서 비공개로 바뀌어 있었고 그가 날 차단했던 탓에 우린 이제 더 이상 팔로우를 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다음 날도 난 그가 일을 마칠 때까지 일이 손에 안 잡힐 정도로 신경을 쓴 탓에 머리가 아팠다.

이건 명확한 표시이자 좋게 말해 '이제 너에게서 멀어지려 해'라는 신호다.


이해가 안 되는 그의 입장이 되어 억지로 생각해 보자면 그 '할 말'이라는 걸로 시작해 대단한 '이별'로 끝내야 하는데 마음의 정리가 정확히 되지 않거나, 혹은 그 단어를 뱉어 본인이 내게 직접적인 상처를 줄 용기가 나지 않아 내가 미리 눈치를 채 주길 바라는 정도로 (그나마 좋게)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건 아무런 변명도 입장 표명도 안 되는 아주 비겁한 짓 같다.

사랑을 시작하는데 최선을 다 했으면 이별에도 최선을 다 해야 하는 게 사랑이고 상대에 대한 배려이거늘.


내 해석이 맞다면, 두 번 상처를 주는 배려 없는 선택 중 이미 한 가지를 저지른 셈이다.



오늘 다시 이야기하자고 낮에 연락을 넣어 놓았지만 일차적 동굴에 들어가 또 어제처럼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연락 한통 올지도 모른다.

그리곤 어제와 같은 상황이 오면 난 이제는 그걸 이별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동굴 문을 막아 서고 왜 그러냐고, 이게 최선이냐고, 동굴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기다려 그 '할 말'이라는 게 흐려지는 거면 기다리겠지만 그게 아니면 의미 없는 동굴행은 날 배려해서 그만두라고 말이다.


자잘한 상처보다 큰 상처 한방을 받는 게 차라리 무너진 마음을 주워 담는 데는 나을 거라고 이야기할 참이었다.


이별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심이 섰을 때 돌아서야 한다.

확신이 서지 않는 이별을 상대에게 들켜버리면 그 순간부터 정체가 없었던 이별이 둘 사이에 존재해버리기 시작한다. 믿었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다.



그랬다. 난 이런 식으로 동굴에 들어가려는 남자에 익숙하지 않았고

배려 없는 그를 향한 이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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