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이색 체험 (6)
솔직히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에서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덕후'다. 사실 나는 덕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어린 시절에도 그 흔한 슬램덩크나 드래곤볼 만화조차 한 번 제대로 보지 않았고,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는 무지하다. 캐릭터를 활용한 굿즈 상품에 대해서도 통 관심이 없었다. 심플한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캐릭터 상품을 통해 나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이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캐릭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B라는 친구를 만난 후였다. B는 오사카 한 달 살기를 하는 내내 숙소를 제공해 주었던 바로 그 친구다. B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캐릭터를 꽤나 많이 좋아하는 소위 '덕후'였다. 그러한 일본의 문화가 좋아 한국에서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일본으로 일하러 오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B와 친해지면서 자연스럽게 일본의 애니메이션, 캐릭터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내 나름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던 것들이 많이 바뀐 것이다. 색안경을 끼고 '덕후'들을 바라봤던 지난 날들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반성하는 바다.
오사카에는 '덴덴타운'이라는 지역이 있다. 수많은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샵들, 그리고 전자상가가 모여 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도쿄의 '아키하바라' 지역과 오사카의 덴덴타운을 함께 견주고는 한다. 덴덴타운에서 또 하나 유명한 것은 백여 개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메이드 카페'다. '하녀'를 뜻하는 메이드(Maid) 카페는, 메이드 복장을 한 종업원들이 고객을 '주인님'으로 모시면서 여러 가지 메이드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종의 '컨셉' 카페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튜버 '다나카'를 통해 '오이시쿠나레!(맛있어져라!), 모에모에 큥!'라는 메이드 카페의 구호가 유명해지기도 했다. 아무튼 이러한 메이드 카페가 밀집해 있는 지역이 바로 이 덴덴타운이다.
친구가 살고 있는 에비스쵸 역에서 난바로 걸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덴덴타운을 지나치게 되어 있다. 그렇기에 나에게 있어 덴덴타운은 좋으나 싫으나 매번 지나쳐야 했던 거리였다. 아마도 숙소가 근처가 아니였다면 한두 번이나 구경 삼아 와봤을 이 거리를 수없이 다니고는 했다. 덴덴타운에는 애니메이션이나 캐릭터와 관련해서는 정말 없는 것이 없다. '애니메이트(Animate)'나 '조신(Joshin)' 등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캐릭터 샵들. 그리고 그 수많은 캐릭터 굿즈나 피규어 중에서 소위 말하는 '득템'을 하기 위해 매의 눈으로 물건을 살피는 수많은 '덕후'들을 마주하게 된다. 가끔씩은 그들이 무엇을 그렇게 유심히 살펴 보는지, 어떤 물건을 그렇게도 찾고 있으며 사고싶어 하는지 함께 살펴보기도 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도 잘 안 보고 캐릭터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들이 왜 그렇게 캐릭터 하나에 열광하는지, 무엇을 찾으려고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지는 잘 이해되지 않았다. 친구 Y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국에서 나를 응원하기 위해 왔던 친구 Y가 있다. Y는 자타공인 '짱구(짱구는 못말려)'의 덕후다. 보컬 트레이너이기도 한 그는 짱구 피규어나 관련된 굿즈를 그의 레슨실에 빼곡히 모아두는 것이 소소한 취미이기도 하다. Y 역시 이전에도 몇 번 일본 여행을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짱구와 관련된 굿즈를 사거나 짱구 가챠(뽑기)에 몇만 원씩 쓰고는 했단다. 그렇게 나를 응원하기 위해 온 Y는 덴덴타운을 보더니 꼭 좋은 짱구 피규어를 사야겠다며 이곳저곳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길거리를 다니다 발견한 한 피규어 샵에서 그는 짱구 굿즈 수집 역사상 가장 만족스러운 짱구 피규어를 두 개나 득템했다. 같이 짱구를 찾아 다니던 나나 친구 B조차도 그렇게나 기쁠 수가 없었다. 마치 숨어있는 보물을 찾아내듯이 덴덴타운 구석구석을 뒤지며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의 희귀한 아이템을 찾는 것이야말로 덴덴타운의 색다른 재미가 아닐까.
메이드 카페에 대해서도 느낀 바가 있다. 오사카 한 달 살기를 한다고 하니 주변 친구들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가장 많이 들은 이야기가 "메이드 카페도 가봐야겠네!"였다. 그러나 왠지 메이드 카페만큼은 가고 싶지 않았다. 뭔지 모를 그 어색함과 부끄러움이 싫었던 것 같다. 이런 나의 성향을 아는 친구 Y는 매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메이드 카페에 데려가서 내가 당황해하는 그 모습을 꼭 보고야 말겠다며, 틈만 나면 "메이드 카페 갈래?"라고 나에게 툭 던지고는 했다.
처음 메이드 카페 거리를 지나갔을 때는 사실 매우 어색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오후 5시 정도 이후가 되면, 메이드 복장을 한 어린 직원들이 슬슬 나와서 전단지를 나눠 주며 호객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예전부터 호객 행위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이 있던 나는, 메이드 카페 직원들에게 절대 호객 행위를 당하면 안 된다는 굳은 심지를 가지고,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그 거리를 지나가고는 했다. 그저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저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몰래 보며 "아, 이런 분위기구나"를 어림짐작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와 함께 덴덴타운을 걷다가 친구가 나에게 물었다. "저 분들 전단지 나눠주면서 무슨 말 하고 있는 줄 알아?" 일본어를 못알아 듣는 나는 뭐라고 하냐고 묻자, "전단지라도 하나 받아가 주세요."라고 한다는 것이었다. 꽤 충격이었다. 무언가 내가 큰 잘못을 한 것 같은 죄책감과 후회가 몰려왔다.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서 소통하고 전단지 한 장 받아주면 되는 것이었는데, 나는 메이드 복장을 한 그들에게 괜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며 그들을 내심 피하고 있던 것이었다. 한국에서도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는 곧잘 받던 나였다. 아무리 전단지를 내밀어도 기어이 피하는 사람들을 보며 은근 마음에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가 여기에 와서 그들과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전단지 하나 받지 않으려 하다니. 나 스스로가 참 못나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마음을 바꿨다. 그때부터 길거리에서 메이드 카페 직원들이 전단지를 나눠주면 적극적으로 받았다. 아니, 오히려 주춤하는 직원에게는 내가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그들은 한결같이 전단지를 받아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환한 미소를 보이고는 했다.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표현하는 고마움 정도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기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고마워하는 듯했다. 물론 서비스 일을 하는 분들이기에 더욱 밝은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대부분 사람들이 전단지를 거절하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쁜 마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들이 나눠준 전단지를 받아서 유심히 살펴 보기도 했다. 각양각색의 다양한 디자인으로 꾸며진 수십 장의 전단지들. 내용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워도 무엇을 강조하는지, 어떤 부분이 각 카페의 장점인지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인스타그램이나 웹사이트로 이동하는 QR코드를 심어 놓은 곳도 있었고, 특별한 혜택을 제공하는 카페도 있었다. 이러한 전단지 하나조차도 처음에 만들 때 누군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저 지나칠 수만은 없는 누군가의 노력이 들어가 있는 결과물이기도 하다.
혹시 오사카에 갈 계획이라면, 그리고 덴덴타운에 들를 계획이라면 메이드 카페 직원들이 나누어 주는 전단지를 꼭 한 번 받아주면 좋을 것 같다. 전단지 받는 것이 부담이 된다면 열심히 호객하고 있는 그들에게 간단히 눈인사나 목례 정도만이라도 해주는 것은 어떨까.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그 길거리에서 외롭게 각자 홀로 서 있는 그들에게 작게나마 힘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