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이색 체험 (6)
세계 최초 컵라면이 일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컵누들(Cup Noodle)'로 잘 알려져 있는 일본의 식품회사 닛신이 1971년 세계 최초로 컵라면을 출시했다. 이에 영향을 받아 1972년 삼양이 한국 최초의 컵라면을 출시했고 1981년에 농심이 사발면을 출시하면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컵라면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일본하면 또 빠질 수 없는 것이 컵라면이다. 마침 오사카 인근에 닛신에서 설립한 컵라면 박물관이 있다고 해서 관심이 생겼다. 단순히 컵라면에 대한 전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500엔만 내면 컵라면 용기를 직접 펜으로 디자인하고 컵라면에 들어가는 스프와 토핑도 직접 고르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체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사카 현지 아이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 않을까 싶어 방문하게 되었다.
닛신 컵라면 박물관은 오사카의 북쪽에 있는 이케다시(市)에 위치하고 있다. 오사카에서는 전철로 편리하게 갈 수 있는 편이며, '이케다' 역에서 내려 걸어서 5~10분 정도만 가면 박물관에 도착할 수 있다. 이케다 역에 내리니 기존에 오사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한적한 일본 소도시의 느낌이 물씬 난다. 비단 컵라면 박물관만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외곽 지역에 오면 이러한 일본의 평범한 마을을 만날 수 있는 것도 큰 장점이다. 관광객 하나 없이 한적한 곳, 말 그대로 현지인들이 있는 그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현장을 목격하는 일은 오사카 한 달 살기를 하는 동안 나의 소소한 기쁨이었다.
박물관 외관과 내부는 꽤나 그럴듯했다.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최신식도 아닌 건물이었지만 굉장히 잘 관리된 깔끔한 인상을 받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수백여 종의 컵라면 용기로 벽면과 천장이 모두 도배된, 마치 '컵라면 동굴'과 같은 입구 통로를 지나가게 된다. 이곳이 이 박물관의 포토 스팟이겠구나 싶었다. 알고 보니 그 컵라면들은 닛신이 1971년 처음으로 컵라면을 출시한 이후 지금까지 출시한 컵라면을 모두 전시해 둔 것이라고 한다. 무려 53년간의 컵라면 역사라니. 맥주공장이 그러했듯 이러한 시간들을 거치며 헤리티지가 생겨가는 것이겠지. 한편으로는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삼양이나 농심에서도 이처럼 현장에서 고객과 만나는 접점을 더욱 많이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이 요즘과 같이 K-푸드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이 그러하다.
컵라면의 종류와 역사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구경만 하고, 본격적으로 컵라면 만들기 체험에 참여했다. 본격적으로 컵라면 만들기 체험에 참여했다. 자판기에 500엔을 넣으면 'My Cup Noodle Factory'라고 쓰인 컵라면 용기가 하나 나온다. 한쪽면은 글자가 쓰여 있지만 한쪽면은 아예 비어 있는데, 이 부분에 내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할 수 있다. 투명 플라스틱으로 된 컵라면 뚜껑도 함께 나오는데, 이 뚜껑은 디자인을 하는 동안에는 열지 말라고 했다. 알고 보니 컵라면 용기를 디자인하는 동안 내부에 이물질이 들어가는 것을 막아주기 위한 용도였다. 역시 세심한 일본인이다.
재잘재잘 일본어로 떠들며 컵라면 용기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일본 초딩들 사이로 나도 한 자리 잡고 앉았다. 자리에 놓여 있는 것은 약 열 가지 색깔의 유성 사인펜들. 문득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생 때는 으레 방학숙제라던지 모둠 활동과 같은 과정에서 꾸미기를 하는 일이 많다. 당시 초등학생 치고 글씨도 잘 쓰고 나름 감각이 있던 나는 남자아이들 중에서는 꾸미기를 꽤나 잘하는 편이었다. 웬만한 여자아이들과도 견줄 정도의 실력이었고 여자아이들 중에서는 남자치고 꽤 괜찮은 내 꾸미기 실력을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때의 실력을 떠올리며 일본 초딩들 사이에서 나도 발군의 실력을 잠시 발휘해 보았다. 당시 나 혼자 지었던 이 책의 가제목은 '어쩌다 오사카'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컵라면에 한국어 '어쩌다 오사카'와 일본어 'たまたま大阪(타마타마 오사카)'를 썼다. 거기에 닛신의 마스코트 병아리인 '히요코짱'을 그리고, '오이시~(おいしい)'라고 쓰니 꽤 그럴듯한 디자인이 되었다.
디자인을 다 하고 나면 안에 넣을 스프와 토핑을 고르는 과정을 거친다. 스프는 일반, 해물, 카레, 토마토 네 가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고, 토핑은 새우, 돼지고기, 파 등 열두 가지 중 네 개를 고를 수 있다. 토핑에는 신기하게 김치도 포함되어 있었다. 카레를 만들고 싶었던 나는 카레와 어울리는 돼지고기, 달걀, 치즈 등 단백질 위주의 토핑을 골랐다. 하나하나 고를 때마다 어찌나 신중해지던지. 영락없이 옆에 있는 초딩들과 비슷해진 내 모습이 웃기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스프와 토핑을 고르고 나면 은박 뚜껑으로 실링하고 최종적으로 비닐로 랩핑하는 것까지 보여주는 것으로 모든 체험 코스가 끝났다.
체험이 모두 끝나고는 박물관 2층도 잠시 둘러보았다. 1층과는 다른 구별된 공간에서 또 다른 체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위층은 봉지라면을 만드는 체험을 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꽤나 많은 사람들이 모둠별로 자리에 앉아 라면 만들기를 체험하고 있었다. 소요시간이 오래 걸려서 그런지 이 체험은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는 말에 잠시 구경만 했다. 머리엔 닛신의 마스코트 '히요코짱'이 그려진 두건을 모두 착용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귀여운 두건을 쓰고 진지하게 체험에 임하는 모습이 흥미로워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았다.
어쩌면 조금은 유치할 수도 있던 컵라면 만들기 체험이었지만 느낀 바가 있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마케팅 업무를 오래 했던 나로서는 이러한 기업의 제품 및 서비스에 대한 고객 경험에 대해 매우 관심이 많다. 3대 맥주 공장도 그랬고 이러한 컵라면 박물관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한 번 고객 경험을 깊게 한 브랜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찾을 수밖에 없다. 이후에 실제로 나는 마트에 가면 닛신의 컵누들이 있는지 종종 살펴보게 되었고, 컵누들을 볼 때마다 이 박물관에 와서 컵라면을 만들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한다. 맥주 공장 역시 마찬가지다. 편의점에 가면 맥주를 고르지 않더라도 괜히 일본 맥주는 얼마나 들어와 있는지를 살펴보고는 한다. 일본은 이처럼 경험을 활용하는 마케팅을 확실히 잘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당장의 매출과 직결되는 마케팅도 필요하겠지만, 중장기적으로 길게 바라보고 기업의 이미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하는 것이야말로 기업의 좋은 마케팅 활동이 아닐까. 많은 고객들에게 즐거움 또한 주고 있으니 좋은 사회적 공헌 활동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