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소도시 여행 (4)
소도시 여행의 첫 행선지는 시라하마였다. 오사카의 남쪽 와카야마 현에서도 꽤나 남쪽에 있다. 오사카에서는 난바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약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일본인들에게는 오랜 기간 사랑받은 휴양지면서도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런 곳이다. 실제로 네이버에서 시라하마를 검색하면 오사카나 교토, 나라 등에 비해서는 훨씬 적은 정보가 나온다. 그만큼 한국인들에게는 아직은 덜 유명하지만 최근 많은 관심이 생기고 있는 여행지가 바로 시라하마다.
시라하마에 가고 싶었던 것은 오직 제대로 된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섬나라 일본이건만 일본 여행을 하면서 제대로 된 바다를 아직 보지 못했다. 물론 오키나와 같은 예쁜 바다도 있지만 그곳은 아직 가보지 못했다. 오사카에도 물론 바다가 있지만 조금 약했다. 특히 부산 출신으로서 어릴 때부터 해운대와 광안리, 송정을 보고 자라온 나로서는 오사카의 웬만한 바닷가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던 중 오사카 남쪽에 시라하마의 바닷가 사진을 보게 되었고, 내가 찾던 그 느낌을 충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닷가 말고는 별 볼일 없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지난 3주 동안 복잡한 오사카 도심에 치였던 나에게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 필요했다.
골든위크가 시작되는 첫날이었던 토요일, 시라하마 버스센터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친구를 통해 미리 예매할 수 있었고, 친구가 없었다면 아마 예매도 어려웠을 것 같다. 버스를 타니 전 좌석 만석이었다. 우리 빼고는 전부 일본인인 것 같았다. 오사카에 와서 수차례 느끼는 것이지만 일본인만 있는 곳을 갈 때 나는 그렇게나 뿌듯하다. 제대로 찾아온 것 같은 일종의 안도감이다. 듣던 바와 같이 골든위크를 맞이해서 오사카에 사는 많은 일본인들도 시라하마로 휴가를 떠나는 듯 보였다. 연휴가 시작되는 그들의 설레는 분위기에 나 역시 동참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고속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다가 '키노카와 SA'라는 휴게소도 들렀다. 일본에서 휴게소를 한 번 가보는 것도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내 여행의 작은 로망이다. 통상 일본의 휴게소는 Service Area, 줄여서 SA라고 표현한다. 우리나라는 워낙 요즘 휴게소가 핫하지 않은가. 휴게소별 맛집도 있고 다양한 테마를 곁들여 꾸민 다채로운 휴게소가 많다. 그래서 나름 기대를 하고 구경을 했는데, 생각보다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식당 음식은 우리가 알만한 라멘, 우동, 소바, 카레와 같은 간단한 음식들 위주로 있었다. 다만 편의점 구성은 역시나 우리나라보다는 훨씬 다채로워 보였다. 전반적으로 보면 우리나라 휴게소가 훨씬 먹거리가 풍성하고 구경거리나 볼만한 것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휴게소 옆에는 저 멀리 일본의 시골 마을들이 예쁘게 보였다. 오사카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들. 우리나라도 서울에서 교외로 조금만 나가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지듯 이곳도 그랬다.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정도 가니 시라하마 근처에 다 왔다. 여기서부터는 시외버스처럼 몇 개 주요 정류장에 정차하는 식이다. 안내 모니터를 보니 '토레토레 시장'에 이번에 정차한다는 메시지가 떴다. 토레토레 시장. 시라하마 여행을 준비하면서 블로그에서 몇 차례 봤던, 시라하마의 대표적인 수산 시장이다. 시라하마에서의 2박 3일 일정 중에 이곳은 꼭 한 번 들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다. 회를 너무 좋아하다 못해 사랑하는 나로서는 참새가 방앗간을 못 지나가듯 수산물 시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친구와 눈빛을 한 번 주고받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릴까?" "응, 내리자." 그렇게 계획 없는 즉흥성을 또 한 번 발휘했고, 토레토레 시장에 내렸다.
시장에 들어가니 우리나라 노량진 수산시장 절반 정도 되는 크기에 각종 해산물, 회, 건어물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시장에서 구입한 재료들로 BBQ를 해 먹을 수 있는 상차림 식당도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식당에서 구입한 회, 초밥 등을 즉석에서 먹을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었다. 블로그에서 찾아봤을 때 시간대가 잘 맞으면 참치 해체 쇼를 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마침 우리가 갔을 때 그 해체 쇼가 진행 중이었다. 이렇게도 럭키할 수가. 시장에는 대부분 일본인밖에 없었고, 일본인들조차도 그 참치 해체 쇼를 신기한 듯 연신 카메라로 찍어가며 넋 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해체한 참치는 즉석에서 상품으로도 판매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저 참치를 안 먹어볼 수가 있나. 그렇게 참치 대뱃살 몇 점과 생선회 몇 점, 스시 등 몇 가지 먹거리를 사서 자리에 앉았다. 회와 스시 맛은 최고였다. 나름 회 좀 많이 먹는다는 나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싱싱하면서도 고소한 풍미가 느껴지는 그런 맛이었다.
토레토레 시장 구경을 마치고 다시 숙소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오사카에서는 주로 지하철을 타느라 버스 탈 일도 자주 없었는데, 시골의 마을버스를 타는 일도 흥미로웠다. 절반 정도는 현지인 할머니들과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 또 절반 정도는 외지에서 온 일본인 관광객들이었다. 버스는 정말이지 천천히 이동했는데, 그마저도 시골 어촌 마을의 정감이 느껴져서 좋았다.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니 우리 숙소가 나왔다. 골든위크 기간이라 대부분 숙소가 꽤나 비쌌는데, 그런 것 치고는 가성비 좋은 숙소를 우연히 하나 찾았다. 무려 다다미 방 2개에 널찍한 거실이 있고, 심지어 정면으로 바닷가 뷰가 보이는 매우 만족스러운 숙소였다. 바깥 풍경은 전형적인 어촌 마을의 정겨운 모습이었다. 아침 출발부터 내리던 비는 그쳐가고 있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숙소에서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피로를 잠시 풀었다. 집에서 나오면서부터 대략 4~5시간의 일정이었다. 그러나 그 노고를 모두 보상받는 듯했다. 내가 원했던 여행이 이런 것이었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게 있는 것. 티비를 틀어 채널을 돌리니 일본어로 된 방송만 나온다. 가장 일본어가 필요 없는 야구 경기를 틀었다. 마침 한신 타이거즈의 고시엔 구장 홈경기였다. 이 날은 아직 한신의 경기를 보기 전이었다. 고시엔 구장에서의 한신의 경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야구를 보다가 잠들다가를 반복하며 그렇게 낮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쉬다가 2박 3일 동안 숙소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사러 근처 슈퍼마켓에 갔다. 10분 정도 걸어가는 길이었는데, 그 10분 사이에 또 다른 시라하마의 매력을 알고야 말았다. 이곳은 올드카의 천국인 것이었다. 비단 올드카가 아니더라도 오사카 시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처음 보는 멋진 자동차들이 정말 많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라하마는 일본의 유명한 휴양지여서 일본의 부자들이 이곳에 별장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멋진 자동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어찌나 멋진 차가 많은지 수십 대의 차를 찍은 것 같다. 시라하마의 올드카를 비롯하여 일본의 멋진 자동차 문화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고자 한다. 어쨌든 그 멋진 자동차들을 보며 느낀 것은, 내가 꽤나 자동차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것이다. 멋진 차를 볼 때마다 나는 진심으로 설레며 행복해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친구조차도 "네가 차를 이렇게 좋아했구나."라고 말했을 정도니 말이다. 한 달의 오사카가 나에게 남긴 여러 소중한 것들 중 하나는, 몰랐던 나의 취향을 확실히 알게 하여 준 점이다.
장 본 것을 숙소에 두고는 저녁을 먹으러 다시 나왔다. 구글 지도에 찾아보니 숙소 바로 근처에 일본 가정식 집이 있었다. 가격도 저렴한데 사진을 보니 꽤나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평점도 무려 4.6이었다. 가게는 굉장히 허름했고 노포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그리고 일본스러움이 물씬 묻어나는 물건들이 많이 있었다. 남자 사장님 한 분과 여자 사장님 한 분이 계셨는데, 여자 사장님이 너무나도 밝은 미소로 우리를 반겨 주었다. 비교적 무뚝뚝하다는 오사카 사람들만 봐와서 그런지 이러한 상냥함이 되려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장님은 마치 일본 드라마 또는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주문부터 음식이 나올 때까지 밝고 친절하게 우리를 대하셨다. 음식 역시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생선 고로케 정식 하나와 돼지고기 볶음 정식 같은 것을 하나 주문했는데, 너무나도 깔끔하면서도 건강한 맛이었다. 조미료가 거의 들어간 것 같지 않은, 말 그대로 가정식 같은 맛이었다. 반찬도 다채로웠다. 오사카의 어느 식당에서도 먹어보지 못했던 일본 현지스러운 몇 가지 반찬을 내어 주셨다. 상냥한 일본인 사장님과 건강한 일본 가정식. 완벽한 조화였다. 우리는 다음 날도 저녁에 이곳에 오자고 다짐했다.
저녁을 다 먹고 시라하마 해변가로 갔다. 마침 일몰 시간이었다. 시라하마는 서쪽을 향한 바닷가 지역이기에 이곳에 올 때 일몰을 상당히 기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종일 내렸던 비 때문인지 아직 수평선 저 끝에는 구름이 가득했다. 예쁜 일몰은 볼 수 없었지만, 시라하마의 하늘과 바다는 너무나도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하늘의 색과 바다의 색이 비슷한 것 같았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 사이로 몽실몽실 떠있는 구름까지. 신비롭고 또 평화로웠다.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퇴사 이후 지난 시간들이 스쳐갔다. 그간의 모든 수고를 대자연으로부터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사카 한 달 살기의 정점은 바로 이곳, 이 순간인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가장 고요하고 가장 평화로운 마음으로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이번 한 달 살기가 어땠는지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일몰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 입구를 들어가려는데 웬 새끼 고양이가 한 마리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작은 몸집의 아기 고양이였다. 너무 귀여워서 쳐다보고 있는데 똑같이 생긴 고양이가 한 마리 더 나왔다. "뭐야!" 하고 있는데, 세 번째 아기 고양이가 또 나왔다. 아마도 형제인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비롯한 강아지 등의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반면 친구는 고양이도 두 마리나 키우고 있고 고양이들을 가족처럼 대할 만큼 고양이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랬던 내가 친구 영향으로 안 그래도 고양이에 대해 조금씩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가고 있었는데, 이 아기 고양이들을 보며 내 마음은 완전히 바뀌어 버리고 말았다.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친구들이었다.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사람에 대한 경계심조차도 없었다. 이런 걸 보고 '뽀시래기'라고 하는 걸까.
난생처음 사랑스러워 보였던 아기 고양이들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다. "그저 바닷가 하나 보고 싶은 마음으로 계획 없이 온 이 시라하마에서, 너무나도 선물 같은 순간들을 계속해서 마주하는구나." 하고 말이다. 고양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내가 고양이에게 살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본 것도 나의 또 다른 취향을 발견한 소중한 순간이었다. 낮에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마주쳤던 수많은 예쁜 자동차들도, 우연히 찾아간 동네 작은 식당에서 만난 친절한 사장님과 맛있는 저녁 식사도, 아름다운 노을과 함께 바라본 시라하마 해변의 평온함도,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아무 계획 없이 온 이곳에서 뜻밖의 선물을 계속해서 마주하면서 나는 또 하나 삶의 지혜를 배웠다. 아등바등 살며 무언가를 성취해 왔던 내 인생도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때로는 이렇게 힘 빼고 아무 계획 없이 살아가는 인생에도 꽤나 선물 같은 순간이 종종 찾아온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