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소도시 여행 (5)
시라하마에서의 이튿날 아침이 되었다. 흐렸던 전날과는 달리 날씨가 맑았다. 평소에 자주 안 하는 아침 산책이지만 이럴 때는 또 아침 산책을 안 할 수가 있을까. 어제 저녁 노을을 보았던 시라하마 해변의 아침이 궁금해서, 밥도 먹지 않은 채 시라하마 해변으로 갔다. 아침에 마주한 시라하마 해변의 하늘과 바다는 어제와는 또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새파란 하늘과 수평선 부근에서 옅어지는 빛깔, 그리고 다시 새파란 바다. 수평선 부근을 제외하고는 하늘과 바다의 색이 거의 비슷하다고 느꼈다. 우리나라 바다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그런 빛깔이었다. 파도는 또 어찌나 맑고 잔잔한지. 바닷속 모래알들이 모두 보이는 듯했다. 너무도 아름다운 그 바다를 또 한참을 바라보고 또 사진을 찍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편의점을 들러 고양이 츄르와 사료를 샀다. 바닷가 산책을 하러 나오는 길에도 어젯밤 보았던 그 뽀시래기 아기 고양이들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내 인생 처음 사보는 츄르였다. 고양이를 너무나도 좋아하는 친구의 의견이었다. 어제는 세 마리였는데 오늘은 한 마리가 늘어 네 마리였다. 아마도 사형제인 것 같다. 준비한 츄르와 사료를 주자 녀석들은 그다지 경계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정말이지 빠른 속도로 츄르와 사료를 먹기 시작했다. 물도 함께 주었는데 물은 식사를 다 마치고서야 할짝거렸다. 친구 말로는 야생 고양이들이라 많이 굶었을 수 있다고 했다. 이 조그마한 녀석들이 굶고 다닌다니. 우리가 있는 동안에라도 배불리 먹었으면 했다. 혹시나 해서 숙소 카운터에도 확인해 봤더니 고양이들의 존재를 알고 가끔 밥도 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어제저녁 느꼈던 그 감동이 다시 한번 아침에 재현되는 듯했다.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 그리고 이렇게 귀여운 네 마리의 고양이들까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아무리 돈이 많고 성공한 사람이어도 지금 이 순간보다 더 행복하고 좋을 수 있을까." 난생처음 느껴보는 그런 감정이었다.
숙소로 올라가서 우리도 아침을 먹고 조금 쉬다가 점심쯤 되어 가까운 관광지에 들르러 다시 나왔다. 이제는 숙소를 드나들 때마다 숙소 입구에 고양이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고양이들은 매번 그 자리에서 항상 있었다. 아기 고양이들이라 멀리 가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점심에 나올 때도 살펴봤더니 세상에, 넷이 나란히 엎드려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누가 억지로 그렇게 연출하려야 할 수도 없겠다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다정한 모습으로 서로의 몸을 베개 삼아 잠들고 있었다. 그런 녀석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찍기 위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 순간 아뿔싸, 나도 모르게 옆에 있는 삽을 발로 차버리고 말았다. 큰 소리에 녀석들은 깨 버렸고 한 마리는 즉시 자리를 옮겼고 나머지 고양이들도 전부 잠이 깨고 말았다. 너무나도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가 살면서 동물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교감하려 노력해 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처음인 것 같았다. 이렇게나 좋을 수가 없었다.
오후에 간단히 가보기로 한 관광지는 마을버스로 10분 정도의 짧은 거리에 있는 '산단베키 절벽'이라는 곳이다. 산단베키는 三段壁, 즉 3단벽이라는 뜻이다. 절벽의 모양이 3단으로 나누어진 듯 보이는 모습에서 따온 이름이다. 산단베키 근처의 정류장에 내리니 작은 슈퍼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는 간단한 먹거리와 몇 가지 과일을 팔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귤과 딸기가 너무나도 싱싱하고 맛깔스럽게 보였다. 여기는 꽤나 남쪽지방이니 귤이 꽤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구입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라하마를 비롯한 와카야마 지방 자체가 귤로 굉장히 유명한 지역이고, 일본 최대 귤 생산지 중 하나라고 한다. 귤 맛은 신맛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극강의 달콤함이었다. 씨도 많았다. 우리의 제주도 귤과 비슷한 듯 묘하게 다른 생김새와 맛이라고 생각했다.
산단베키로 갔다. 가슴이 탁 트이는 넓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그런 넓은 바다였다. 부산의 태종대, 또는 제주도의 용머리 해안이나 송악산 인근에 가면 볼 수 있는 그런 절벽이었다. 다른 나라에 와서 우리나라와 비슷한 듯 조금은 다른 이런 자연의 모습을 보는 것 역시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특히 일본은 우리와 지리적으로도 인접해 있으면서도 섬나라라는 특성이 있어 비슷한 듯 다른 면이 있다는 생각이 더욱 드는 것 같다. 그 대자연을 앞에 두고 아까 사 온 귤과 딸기를 먹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싱싱한 과일을 먹는 맛은 특별했다. 어쩌면 나는 지난 18년이 넘는 서울에서의 빡빡한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가서 사는 것도 꽤 괜찮은 삶일 거라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제 나는 자연을 꽤나 좋아한다.
하늘을 보니 매처럼 생긴 새가 하늘을 날아다닌다. 매는 우리나라에서도 멸종위기 1급 동물로 분류될 만큼 청정지역에서만 서식하는 조류다. 그런 매가 보인다니. 이곳의 자연이 얼마나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곳인지를 반증하는 듯했다. 저 멀리 바다를 보니 네 대의 수상 오토바이가 바다 위를 달리고 있었다.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이 드넓은 바다에서 저렇게 자유롭게 달리는 낭만이라니. 그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아름다운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조화로움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단베키 구경을 다하고 숙소 쪽으로 다시 돌아왔다. 역시나 숙소 입구를 지키고 있는 뽀시래기 고양이 네 마리들. 배도 부르겠다, 낮잠도 잘 잤겠다, 고양이들은 재밌는 오후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 하루 사이에 우리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했는지, 이제는 고양이들은 우리를 조금도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 우리 앞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우리 주변을 서성이면서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것이었다.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고 있으면 내 카메라를 뚜렷이 쳐다보는가 하면, 심지어는 벌러덩 뒤집어 누어서 배를 까고는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었다. 친구에게 들으니 고양이가 배를 까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준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그만큼 우리를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 이 조그마한 녀석들도 자신을 보살펴 주고 먹을 것을 준 사람을 안다는 게 너무나도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또 고양이들과 교감을 나누었다.
저녁엔 전날 갔던 일본 가정식 백반 집을 또 방문했다. 어제 또 오겠다고 사장님께 약속하기도 했고, 숙소 근처에 나름 식당은 꽤 있었지만 이것보다도 더 먹고 싶은 것이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 시골 마을의 정감이 가득한 이 식당과 가정식을 다시 한번 꼭 맛보고 돌아가고 싶었다. 식당에 들어가자 사장님은 단번에 우리를 알아보고는 어제처럼 반갑게 우리를 맞아주셨다. 오늘 주문한 메뉴는 함박 스테이크 정식과 오므라이스. 역시나 의심할 여지가 없는 건강하고 신선한 맛이었다. 반찬 종류도 어제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구성이었다. 이 식당에 대한 나의 좋은 마음을 사장님께 전하고 싶어 파파고를 켰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한 달 동안 여행 중인데, 이 식당은 저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식당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또 오고 싶어요."라고 쳐서 보여드렸다. 사장님은 처음에 내가 핸드폰을 건네길래 놀라는 표정으로 보시더니, 이내 번역된 일본어를 읽고는 세상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아리가또!"라고 화답해 주셨다. 그러면서 아까 산단베키에서 샀던 귤도 몇 개 전해드렸더니 더 좋아하셨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친구에게, "나중에 오사카에 오면 꼭 또 놀러 와!"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가게 문을 열고 나가는 길까지 마중해 주시면서 내 어깨를 톡톡 치며 밝게 작별인사를 해주시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다. 말하지 않아도 교감되는 느낌이 이런 걸까. 그래, 이번 시라하마 여행의 결론은 '교감'이었다. 우연히 만난 고양이들과도, 이틀 내내 방문했던 식당의 사장님과도, 그리고 대자연과도 말이다.
저녁을 먹고는 시라하마에서의 마지막 노을을 보러 다시 해변으로 갔다. 흐렸던 어제저녁과는 또 다른 바다와 하늘의 풍경이었다. 이 시간을 위해 오사카에서부터 준비해 온 돗자리도 펼쳤다. 그리고는 지는 해를 한참을 바라보았다. 골든위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이틀차라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해변가에서 함께 지는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플들의 모습도 보였고, 어린아이와 함께 온 가족들의 모습도 종종 보였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친구들이 여럿이 무리 지어 온 모습도 보였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고등학생 때는 친구들끼리 모여 버스를 타고 바다를 가고는 했다. 특히 부산 사람이었던 우리로서는 식상한 해운대나 광안리가 아닌, 기장의 임랑 해수욕장이나 대변항 같은 곳을 가는 것이 그 나름의 낭만이었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 친구 중 첫 차가 생긴 친구의 차를 타고 강릉의 동해 바닷가나 서해의 대천 해수욕장 같은 곳을 가는 것이 남자들이 추억을 쌓는 방식이었다. 저들도 그러한 소중한 추억을 쌓고 있는 중이겠지. 저들의 10년, 20년 뒤에도 지금 이 시간들이 기억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흐뭇했다. 해지는 하늘과 바다도 아름다웠고, 그것을 바라보는 그 청춘들도 아름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