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사이 소도시 여행 (9)
오카야마에서의 짧은 여행을 마치고 구라시키로 이동했다. 오카야마에서 구라시키는 전철로 20분 정도 이동하면 되는 가까운 거리다. 그래서 보통 오카야마와 구라시키는 묶어서 함께 여행하는 편이다. 그 이름부터 강렬한 '구라시키'. 이곳에서 유명한 것은 '구라시키 미관지구'다. 미관지구는 도시의 '미관'을 유지하기 위해 법으로서 지정하는 지구를 말한다. 구라시키의 일본 전통 가옥들이 모여 있는 지역을 미관지구로 정하고 보존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로 치면 북촌한옥마을이나 전주, 경주의 한옥마을과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되겠고, 오사카에서 가까운 교토의 기온 거리도 과거 천년 수도였던 교토의 옛 모습을 가능한 훼손하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구라시키에 내리니 날씨는 여전히 흐렸지만 굵게 내리던 빗줄기는 다시 조금씩 얇아졌다. 언제든지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매우 흐린 날씨였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 미리 봤을 때는 맑은 날씨의 미관지구가 참 예뻐 보였기에 조금은 아쉬웠다. 하지만 흐린 날씨 덕분에, 그리고 골든위크의 마지막 날인 덕분인지 구라시키역에서부터 꽤나 한산했다. 관광객들이 거의 다 빠지고 난 뒤 같았고 골든위크의 마지막 날 이곳에 도착한 것은 우리를 비롯한 몇 무리밖에 없는 듯했다. 예약해 둔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쉬다가 미관지구를 구경하러 다시 밖으로 나왔다.
숙소에서 미관지구로는 걸어서 15분 정도만 이동하면 되었다. 비를 피하기 위해 상가 아케이드를 통해 미관지구 쪽으로 걸어갔다. 연휴 때문인지 아케이드도 대부분 영업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걸으니 옛 가옥들과 함께 미관지구의 모습이 보인다. 미관지구의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여긴 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길거리. 그리 요란스럽지 않은 모습들. 지나치게 관광지스럽지 않은, 현지의 색깔을 비교적 잘 유지하고 있는 듯한 가게들. 사람 많고 복잡한 교토의 기온 거리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가장 좋았다. 오사카 한 달 살기를 하며 어딜 가든 조금이라도 예쁘거나 유명한 곳은 인파에 늘 휩쓸려야만 했다. 그런데 이 예쁜 거리를 걷는데 사람이 별로 없어 눈앞의 시야가 확보되다니. 이 쾌적함이 너무나도 좋았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마치 잘 관리된 유럽 한 도시의 올드타운을 보는 듯했다. 우리가 유럽에 가면 낭만적이라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몇 백 년 이상 잘 관리된 오래된 건물과 거리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양의 건물들은 대부분 목조 위주의 건물이라 오랜 기간 보존되지 못하는 반면, 서양의 건물들은 벽돌 위주의 건물이라 상대적으로 오랜 기간 지금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구라시키 미관지구의 전통 건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목조 건물임에도 굉장히 깔끔하고 정갈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거리 역시도 마찬가지. 모든 것이 자동차 도로 중심의 효율성 위주로 지어진 현대식 도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사람 도보 중심의 옛 마을 느낌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언젠가 건축학자 유현준 교수의 책을 읽었을 때 그런 내용이 있었다. '걷고 싶은 거리'는 거리마다 오밀조밀 모여있는 상점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이다. 구획별로 쭉쭉 뻗은 테헤란로보다는 명동 거리, 더 나아가서는 신사동, 인사동 같은 골목길을 걷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말 그대로 '걷고 싶은 거리'였다.
그렇게 길거리를 천천히 구경하며 걷다 보니 한 곳에 도착했다. 구라시키 여행에 대해 검색했을 때 사진으로 가장 많이 보았던 그 장소다. 강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많이 좁은 '구라시키 강'의 강변을 따라 잎이 무성한 버드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강 중간에는 작은 다리도 있었는데 그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까지도 그 풍경을 훨씬 운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곳이었다. 친구와 나는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시라하마가 최고인 줄 알았는데 다른 방면에서의 또 다른 최고를 발견했다고 말이다. 비가 내린 후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라니. 아니, 비가 와서 오히려 이렇게 차분하고 한적한 풍경인 것일까. 강에는 거짓말처럼 물 위를 떠다니는 백조 한 마리도 있었다. 백조는 구라시키를 대표하는 모델인 것처럼 카메라로 연신 찍어대는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자적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구경하다 보니 다시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아쉬웠지만 다음 날 아침 날씨가 갠다면 다시 한번 오겠다고 다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저녁시간을 숙소에서만 보내기에는 아까워 구라시키 역 근처에 있는 아울렛과 쇼핑몰에서 한참을 구경하고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숙소 근처의 한 슈퍼마켓을 들렀다. 제대로 저녁을 챙겨 먹지 않아 간단한 저녁 겸 간식거리를 살 생각이었다. 시간도 적당히 9시 정도라 마감 세일을 하는 간식거리들을 득템 하겠다는 요량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슈퍼마켓에서 신세계를 경험하고야 말았다. 친구가 사는 숙소 근처의 슈퍼마켓에서는 저녁 마감 세일에도 보통 최대 30~40% 정도의 할인 밖에 하지 않는다. 정말 가끔 50% 정도의 세일을 본 것이 최대 할인 폭이었다. 그런데 이 슈퍼마켓에서는 대부분 먹거리에 기본 70%부터 많게는 80%까지도 할인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먹을 만한 것도 많이 남아 있었다. 보통 오사카의 슈퍼마켓에서는 9시 정도면 웬만한 먹을 만한 것은 이미 다 빠져 있는 시간대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스시니, 회니, 각종 튀김이나 김밥 등 너무나도 많은 먹거리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슈퍼에서 위풍당당하게 전리품을 쟁취해 왔고 숙소에서 그 전리품을 모두 먹어 치웠다. 그렇게 2박 3일의 여행의 마지막 날 밤이자 35박 36일 한 달의 오사카의 34번째 밤도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어제 내렸던 비는 완전히 개고 맑은 아침이었다. 우리는 체크아웃을 하고 프론트에 짐을 맡기고는 다시 한번 미관지구로 향했다. 약 열흘 간의 긴 골든위크가 끝난 구라시키의 거리 모습도 전날보다 분주한 모습들이었다. 전날 닫았던 가게들도 문을 열고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고 현지 사람들도 출근하는 듯한 모습들도 종종 보였다. 유치원에 아이를 맡기고는 울타리 밖에서 한참을 유치원 내부를 쳐다보는 엄마의 모습도 보였다. 연휴가 끝나고 모든 것이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전날 영업하지 않던 많은 가게들도 문을 열고 있었다. 덕분에 전날 보지 못했던 것들도 이것저것 구경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는 한 가지는 '진(jean)' 소재 상점들이다. 구라시키에서 남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곳에는 '코지마'라는 지역이 있는데, 이곳은 일본의 청바지 원단의 생산지로 유명하다. 덕분에 구라시키 역시 다양한 청바지 소재의 의류나 액세서리를 판매하고 있었다. 귀여운 액세서리들이었지만 가격은 결코 귀엽지 않았다. 아마 상당한 프리미엄 제품들이지 않을까 싶었다. 또 하나 눈에 띈 것은 길을 가다 우연히 한 가게의 건물 밖 전시장에서 만난 '건담 재즈 밴드'였다. 주먹보다 조금 큰 네 대의 건담 피규어들이 각각 드럼, 콘트라베이스, 트럼펫, 플룻을 들고는 연주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건담이 밴드 연주를 하다니. 그것도 심지어 락 밴드도 아니고 재즈 밴드라니. 이틀 전 보았던 히메지 재즈 페스티벌이 생각났다. 건담을 가지고 밴드의 모습을 연출하겠다는 상상 자체가 일본인이기에 할 수 있는 귀엽고 기발한 상상력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보면 좋아할 만한 구석을 찾기 참 어렵지만, 문화예술적인 면에서 보면 여전히 일본은 좋아할 만한 구석이 참 많은 나라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시 찾은 구라시키 강에서는 전날에는 비가 와서 운행하지 않던 강배들도 영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된다면 나도 저 강배를 타고 유유자적 구라시키 강을 떠돌며 풍류를 즐겼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여행객의 본분은 '객(客)'이라는 것. 다음 날이면 이제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그간의 한 달의 종적을 나름대로 정리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구라시키는 총 열 번도 넘는 나의 일본 여행 중에서도, 그리고 한 달의 오사카 생활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웠던 곳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곳에 꼭 다시 올 것을 다짐하며 맑게 갠 미관지구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고 또 사진에 담은 후에야 구라시키를 떠나는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여행의 낭만이 사라진 오사카를 떠나 주변 소도시를 찾아다녔던 여행은 그렇게 모두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