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이고, 사회의 시민이다.
당연히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비판보다 어렵다. 앞선 존재와 개념의 흠을 발견하고 부정하는 일, 곧 비판의 속성에는 창조(이 단어가 본래 가졌으나 잃어버린 두근거리는 싱그러움이 그립다) 활동의 필연적인 부산물인 창작의 고통, 비판에 노출될 위험성, 결괏값의 불안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안 없는 비판을 부득이하게 해야 할 때라면 자신을 그 부정 안에 넣어 행위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일 수 있다. 나는 이것을 종종 기독교에서 공적인 회개라는 개념으로 써왔다고 본다. 예레미야의 기도나 느헤미야의 통곡처럼 자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나라의 상황과 위험을 각자의 죄의 결과로 끌어안은 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성경적 맥락에서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기도로 다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궁금한 것은 지도자들을 향한 예레미야의 책망과 느헤미야의 실제적인 정화운동은 과연 맥락에서 읽어낼 수 없는 것인지 '적용'하면 안 되는 것인지, 이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비판에 대한 비판'의 도마 위에 자신을 올려보길 바란다. 그리고 사람들의 외침이 다만 권력에 대한 비판이 아닐 수도 있다는, 부끄러움과 자괴감이자 간절한 소망이지 않을까 하는 가능성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 이후에 사회적 감수성을 동원하여 '역사적 흐름과 사회적 책무라는 측면'에서 자신이 뉘우쳐야 한다는, 신앙의 한 체계에서라도 회개를 새롭게 이해해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