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선거를 치르는가
대표를 세우는 까닭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너무 많고 다양한 사람'과 '포괄 행정력 획득'으로 보는 기능론에서 찾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마도 발견지는 인간의 마음일 것이다. 그러기에 선거는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나는 강제력 그 자체다. 난립하는 권력욕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권력의 주체를 무너뜨리는 역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다시 이 힘은 생활의 큰 방향을 결정하고 강제하기도 한다. 그러기에 동시대 누구보다 더 참을성이 없고 본인과 비슷한 존재가 겪는 어려움에 민감했던 이들은 외쳐왔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지 않고 수단으로 삼는 모든 힘이 종말이라는 비명을 지를 때까지.'
영화 <아이로봇>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차세대 로봇'의 논리는 무서울 만큼, 인간의 선택이 만들 지옥, 혹은 디스토피아에 관한 통찰력을 지닌다. 힘의 원천인 사람을 제거하여 사람을 위협하지 못하게 하는, 곧 사람이 '더 이상' 위험하지 않게 하겠다는 인류 종언 선포다. 이는 빈대가 싫어 초가삼간은커녕 집도 세우지 말자는 격이다.
이 언어도단은 비웃어 넘길 수 없는, 세세토록 유효한 경계석이다. 역사의 인간은 집을 세우지 않을 수는 없었으므로 마치 로봇과 같은 순전 무결한 대상(이라 여길만한 것)에 '압도적인 힘을 모아두려'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유니콘을 잡는 것 혹은 그보다 못한 행동, 곧 바위가 스스로 움직이길 바랐던 어리석음이었다.
유사 이래 가장 위험한 망상은 힘의 독점을 당연하다 여기는 생각이다. 본인은 순전한 로봇과 같은 존재이기에 '함께하지 않은 이들은 무결하지 않다'는, 그들을 부정하다 못해, 없다고 무시해도 될 존재로 단정 내리는 망상이다.
인류가 유전적 각인 덕택에 자가 멸종을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들 멸절할 가능성은 다분하다. 안타깝게도 무엇이든 만들어내려는 사람의 마음은 쉽게 교훈을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모두가 함께 사는 방법이 곧 내가 사는 방법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거부하는 망상을 깨부수기까지 인류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때문에 인간은 죽음이 덮은 무덤 위를 오르는 사람의 자손들을 교육할 제도를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세우는 선거는 인간 세계를 지탱시키기에 온당한 방법일까. 지금까지는 과연 그러했고, 이보다 더 나은 제도가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나 서로를 믿지 못하는 만큼 지속돼야 할 견제와 항거는 분명 우리를 피로하게 한다. 안식은 동화의 마지막 장면일 뿐이다.
그럼에도 약간의 두통을 감내하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생활'을 얻는 선택이어서다. 삶이 거저 받는 것이라면, 생활은 연속하는 선택이다. 살아있기만 한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느끼고 삶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흘끗 보고 얼핏 감지할 뿐이고, 제 지론에서 찢겨져 나와, 빙글빙글 돌면서 삶의 이런저런 관점을 마주한다. (47면)
시간이 지나면서 싫어했던 것을 좋아하게 되고 좋아했던 것을 싫어하게 된다. (48면)
고개를 저으며 "아, 내가 자네 나이였을 때는 그리 생각했지."라고 말할 때 노인은 젊은이의 주장을 입증한 것이다. (52면)
삶의 격렬한 충돌과 부조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절망적으로 아둔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지론을 비명처럼 내지르는 편이 낫다. (55면)
-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