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처럼, 겁쟁이처럼
2017.05.11
그림자
바람에 일으켜진 먼지가 바닥에 내려앉듯이 스러지고 닳아져 마침내 말미를 맞이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멸은 사람의 타고난 운명이기에 잡히지 않을 불로장생을 슬퍼만 하기엔 삶에 드리운 그림자가 너무 짙다.
인간은 '자신의 선택'으로 스스로 무너지고 파괴된 채 사그라드는 나약한 생명을 가졌다. 이것이 지워지지 않는 첫 번째 그림자다. 각 생명은 찰나의 순간, 자신을 삼키는 죽음이 데려 온 허무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챈다. 죽음의 소식을 들은 이들은 허무가 새긴 과거를 겨우 볼뿐이다.
여러 의미에서 그렇게 끝이 나지 않았을, 혹은 그렇게 끝이 나서는 안 될 이야기에 막이 내려지면, 사람의 마음은 급작스레 생이 마감된 현장에 달려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덮쳐오는 허무에 밀려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만다. 도망친 마음이 죽음을 피해 멀리 돌고 돌아, 안정된 제자리를 찾아내면 사람의 역사로 살아가게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미련함, 나약함, 허무를 보편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람의 죽음에서 마주하는 두 번째 그림자도 '자신의 선택'에서 기인한다. 누군가의 마지막이 마음의 문을 두드린다. 분노와 당혹이 증발된 곳에 나타나는 책임감. 삼켜진 자는 말이 없기에, 산 자들은 그가 자초한 삶의 끝이라, 혹은 불가항력의 운명이라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하지만 소용이 없다. 당사자가 죽음까지 나아가게 한 신념, 혹은 누군가를 죽음에 처하게 해도 괜찮다는 신념은 어디에서 왔을까. 이 가치가 뿌리를 내리는 동안 방관하진 않았을까. 뿌리를 내려 맺은 결국이, 그것을 지적하는 나와 전혀 관련이 없다 할 수 있을까.
무지한 바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찾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몰라 더듬기만 하다가 마침내 그것이 되는 것. 무엇인지도 모른 채로 다만 있다고 믿으며 찾으며 배회하는 모습이 삶이 그리는 궤적이지 않을까. 살아가는 사람은 어느 것도 확신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상태를 반복하는지 모르겠다.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앎은 필멸이다. 언제인지, 그것을 어디서 찾을지는 역시 알 길이 없지만 누구나 멸망을 맞이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자명한 사실을 망각하는 것이 삶의 대부분을 지속하게 하지만 때론 특정한 무언가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을 살게도 한다.
고통에 노출된 사람들, 그리고 누구보다 예민한 이들은 필멸이 가져다준 두려움 덕택에 겨우 자신의 생을 이어간다 표현해도 필자는 과언이 아니라고 본다. 이들은 쉽게 시작점을 찍지 않을뿐더러 마침표도 함부로 허락지 않는, 그런 가련한 마음을 품는다.
궁금증은 여기에 있다. 언젠가 분명 '끝'이날 거라는 분명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으려나. 모든 것의 끝이 찾아오기 전에 끊임없이 찾아올, 수많은 작은 종말 지점을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
겁쟁이 사랑
사람은 그러기에 '가치'있는 것을 사랑한다. 가치 있다 여기는 이유는 영원해서가 아니다. 가치 있는 것을 영원하다 보지 않기에 사랑한다. 가만히 두어도 영생하는 가치여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영원할 수 없고 부패하고 타락하기에 사랑한다. 고귀한 것이 저급해질까 봐. 아름다운 것이 추해질까 봐. 공을 들이고 시간을 쪼개어 희생하기를 자처하는 이유는 소중히 여기는 가치가 영원히 존재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고 믿기에 그렇다.
이것과 달리 내일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이는 아주 귀중한 것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관용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늘의 가치를 환산할 수 없다는 의미와 다른 개념이다. 내일은 아직 없기 때문이다. 내일은 언제나 영영 오지 않고 오늘만이 항상 있다. 다음 날이라는 개념은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고귀하고 아름다운 무언가다. 때문에 겁이 난다. 통제되지 않는 미래는 보이지 않으며 관찰되지 않는, 추측만 할 뿐 예언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내일의 종말
내일이 없다면 찾아올 마지막도 없는 것이 아니냐는 말장난이 가능해 보인다. 결론부터 내리자면 그렇지 않다. 끝은 오늘 찾아온다. 오늘이 항상 있는 것처럼, 종말은 맞이하려는 자에게 매일 찾아온다.
내일은, 그런 연유로 이미 종말을 맞이했으나 여전히 내일이 두렵다. 겁이 나는 이유는 계산되지 않는 미래가 여전히 조금씩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와 매일 자신을 종말의 사형장으로 끌고 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도 겁이 나는 게 괜찮다는 사치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마음껏 겁을 내고 실컷 바보가 되어 살아가는 게 본래 사람의 생태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실종된 불안감을 찾아 굳이 걱정하다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이 소중한 것을 가치 있게 지키는 기본자세일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나는 매일 종말을 맞는다.
2018.06.29
나의 종말
그리고 이제 나는 나 자신의 종말을 고하는 바이다. 나는 새로워지고 있다. 고대에서 내려온 이상한 컬트 같은 행위나 종교적인 신비스러움에서 얻은 무언가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삶 자체가 신비스럽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의 그림자와 조우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림자를 영원히 떼어낼 수 없음을, 삶의 찬란한 빛 앞에서는 강렬한 그림자가 그려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한다.
이제는 그림자에게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한다. 영원히 맞닿지 못할 손짓일지 모르지만 어둠을 향해 화해의 인사를 나누고자 한다. '종말'로 지금의 나를 맺고, 새로운 매듭을 짓기까지 다시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있음에, 그림자를 가진 존재임에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