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살아가다 #4

책: <쟁점한국사-근대편>, 창비

by 쓴쓴
출판사 창비(창작과비평)가 독자들에게 단회로 제공하는 '공부한당'을 통해 도서, <쟁점 한국사>를 읽고 4회에 걸쳐 서평을 나누어 올린다.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의 목차를 첨부한다(이어질 4편의 서평 중 각 글에 해당하는 차례에 굵은 표시를 해둔다).

<쟁점 한국사-근대편>은 전근대편, 현대편과 더불어 총 3편으로 이루어진 기획도서다.


1) 동학농민전쟁을 다시 생각한다

2) 대한민국 외교의 가능성과 한계

3) 3.1 운동, 서로 다른 세 개의 기억

4)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

5) 식민지의 젊은이들, 오늘의 젊은이들

6) 기억 저편의 사회주의 혁명가들

7)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대가

8) 잘못 낀 첫 단추, 일본군 '위안부'


계획된 4편의 서평 중 마지막 글이다. 그동안 편의상 2개의 내용을 한 묶음으로 잡아 글을 썼는데 의도치 않게 매 회마다 서로 연관된 주제를 담은 평을 남겼다. 첫 회는 '요동치는 조선의 근대'라는 이름으로 축약하고 싶고 두 번째에는 '나라 잃은 백성, 시민의 정부를 세우다'라는 제목을 붙이고 싶다. 그리고 세 번째 회차를 '일제강점기의 청년들'이라 부른다면 네 번째 곧, 이번 편은 '일제가 남긴 아픔'이라 말해야겠다.




한반도의 근대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전해질 아픔과 끊이지 않는 오욕을 남겼다. 그날만의 역사로 남아야 했던 상처는 그 아픔을 치유하려 했으나 좌절되었던 시도들의 기록과 뭉쳐졌다. 해결되지 않은 친일청산은 그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모든 것이 되었다. 그것으로 한국 근현대사는 요동쳤 뛰노는 파도와 같은 역사는 마디마다 상흔을 입혔다.


저자는 분명히 밝힌다. 친일청산이 성공할 수 없었던 탓은 이승만의 방해 때문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정부 수립 이후 직전의 미군정을 그대로 이어받아 친일파와 조선총독부 출신의 군과 관리, 경찰과 사법관료를 유지시켰고 정부의 요직에도 친일파를 대거 등용시켰다. 독립운동가들은 해방 전부터 친일청산을 신국가 건설운동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았고 친일파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이승만은 정부 수립 이후, 그들의 요구를 묵살해버렸다. 민족적 열망이었던 친일청산을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이해하는 정치문화는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이후 이승만은 지속적으로 친일파를 보호하는 데 앞장선다. 제헌헌법에 따라 조직된 '반민특위'의 행보를 노골적으로 반대한다. 후에는 여러 이유를 들어 방해한 끝에 결국 해산시켰으며, 6.25 전쟁 중에 친일청산의 근거가 되는 '반민법' 자체를 폐지시킨다. 이승만이 내세웠던 '반공'은 해산을 주장하던 논리 중 핵심으로 친일청산이 사회를 어지럽히려는 좌파세력의 선동이라는 주장이다. 이 외에 친일은 어쩔 수 없었다는 '친일 불가피론', 일제 하에서는 모두가일을 한 것과 다름없다는 '전 민족 공범론'과 같은 그들만의 주장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근거는 놀랍게도 우리가 생생히 느낄 만큼 지금도 똑같이 이용된다.


1987년 6월 항쟁이 있기 전까지 역대 정부의 대통령과 대법원장, 초창기 육군 참모총장이 거의 친일파였거나 친일군, 혹은 친일파와 손을 잡았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분단 세력과 독재세력을 친일세력으로 보는데 역사가 이 견해의 든든한 근거가 된다. 권력을 차지하려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도록 상황을 만들고 친일파와 손 잡았던 이승만에서 박정희로 이어지는 독재정권까지만 생각해보아도 매우 타당한 주장이다. 이는 바로 분단과 독재체제를 거치며 발생한 희생자 문제로 이어진다. 친일세력과 분단, 독재세력과의 결탁 및 동일성에 납득한다면 해결할 지점이 친일청산과 맞닿아 있다고 동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6월 항쟁 이후의 민주화는 우리에게 많은 의미를 던져준다. 민주화는 독재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과거사 청산을 다시 시작하게 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모금활동을 벌여 <친일인명사전>을 만드는 데 십시일반 돈을 보탰고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반민규명법을 개정하도록 압박했다. 또한 친일파의 후손들이 조상들의 재산요구하지 못하도록 친일재산특별법도 제정하정치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두 가지 특별법으로 출범한 반민규명위와 친일재산조사위는 늦게나마 국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을 하지만 친일재산에 해당되지 않는 과거의 흔적을 좇는 조사에 머문다는 한계가 드러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친일세력과 독재정권 사이의 관련성을 밝히는 일을 멈추어선 안 되는 까닭은 정부 수립 이후의 부패와 부정 뒤에 친일파가 있음을 밝히는 역사의 증언 때문이다. 그러기에 시민들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다. 독립운동가들의 근대사를 친일세력의 역사로 만들려는 이들의 행보를 관심 있게 들여다보는 일이 지금 우리에겐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지키는 일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 많은 것들이 그러했듯이 전쟁의 참혹함을 이야기하는 공론장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했다. 일제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은 지 27년이 지난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 제국주의는 1945년 패망할 때까지 전시동원을 감행했다. 그들은 필요한 물품과 인력을 조달하도록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고서 물품(강제공출)과 사람(징병제)을 강제로 빼앗아 갔다. 그리고 '성'을 빼앗았다.


'위안부'는 운영상 각기 다른 조직처럼 있었지만 사실상 일본군이 직접 관리으므로 군에 소속되어 군대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였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동참했다고 하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의지하는 증언은 일본인 '위안부'의 것인데 그들은 성인이었으며 실제로 돈을 받으며 일했던 자들이다. 이와 달리 조선인들은 선정된 업자를 통해 미성년자들을 속여 데려왔다. 일종의 취업사기로, 자신들의 식민농정으하층민이 된 조선인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겠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일제의 잘못은 단순히 '위안부'를 만들었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 제국주의는 '위안부'제도를 군과 그들의 점령지를 다스리는데 이용했다. 그들은 일본군 내부에서 벌어지는 폭행을 통제하는 방도로 '성'을 이용했다. 그러나 점령지의 '성'을 빼앗기엔 치안이 안정되지 않으니 반란이나 소동을 피하려고 식민지에서 데려온 '위안부'를 이용했다. 결국 그들의 잘못은 단순히 민족적 차원의 문제가 아 남성은 총알받이로 여성은 성적 대상물로 이용한 인권유린의 문제이자 인류 보편의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불인정의 문제는 일제에게만 있지 않았다. 해방 후 국군에는 일제 식민지 정책의 유산이 남겨졌다. 한국군 '위안소'는 일제가 행한 결과와 동일하게 남성의 성욕을 자연스러운 생리작용으로 만드는 효과를 낳았을 것이다. 이는 성폭행과 성매매가 용인되는 사회적 분위기를 일컫는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외화 벌이 명목으로 일본 남성에게 기생관광을, 미군에게는 '양공주'라는 이름으로 국가가 성매매를 주도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국 정부의 고질적인 문제가 한국사회의 만성적인 문제로 연결된다. 오래된 가부장제 문화가 피해자들의 폭로를 막아왔기 때문이다. 순결 이데올로기는 성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그 책임을 묻고 성폭력 언급을 꺼리게 하기에 '위안부' 생존자 중에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이것은 성폭력과 전쟁의 상흔으로 남겨진 상처를 개인의 감당해야 할 짐으로 국한시켜 피해자를 스스로 숨게 한 하나의 예일뿐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그들의 주장과 의견을 듣지 않는 정부와 싸우면서도 그들과 비슷한 아픔을 격은 이들과 연대했다고 한다. '양공주'라 불리던 기지촌 여성들이 한국 정부에 낸 소송을 지지했고 한국군인에게 살해당한 베트남 민간인들에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한국군에게 강간당한 피해자들을 위한 기금을 모아 지원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분들은 오래도록 구조적 폭력을 겪으며 스스로 그리고 서로 아픔을 치유하는 방법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분들만의 연대로 멈춰있기에는 시대의 상처가 너무 크다. 그리고 우리가 지닌 관심의 폭은 너무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