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예술이어야 한다
간혹 무엇이 잘못되었길래 저리도 불편할까 생각하곤 한다. 긴 질문에 대한 짤막한 답들은 여기저기 널려있긴 하다. 하지만 이해받지 못한 인간에게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위로는 터질듯한 감정을 막아서는 미봉책, 갈증을 미루는 탄산음료와 같다.
때문에 시대를 앞서갔다느니, 때가 차지 않았다느니 하는 '때'와 인물의 경주, 즉 이러한 안타까움의 언어는 상상의 가치를 폄하하는 비유다. 다시 말해 시대와 불화하도록 세상에 던져진 타인을 상상하지 못한 본인의 탓을 외부 어딘가로 전가하는 말이다.
그렇게 나도 어떠한 질문에서 불편함의 이유를 찾는다. 나는 도대체 이 시공간에서 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하는 실존적 물음을 던진다. 그럼에도 물음 앞에 대답하지 못하는 상태는 덜 불편하다.
정말 불편한 질문은 왜 나는 어떤 이해에 반하는 존재로 태어나, '나'라는 의견을 숨겨야만 하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오해의 소지를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거나 적발당하면 왜 안 된다고 믿는 걸까.
배설의 욕구를 참지 못하는 이들의 표적이 되기 싫어서 '나'로서 살아가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시공간에 갇힌 자신이 진실로 진실로 불편했다.
하지만 예술은 달랐다. 아니 같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문학과 음악이 담긴 그릇은 매우 얇고 찢어지기 쉬운 반투막이어서 흘러내리고 흐른다. 쉽게 닳아지지 않고 넘쳐서 나의 목을 적시고 몸을 씻긴다.
문학 속 인물의 대사와 몸짓에 공명하는 나는 노래를 들으며 본인만의 응원가를 부르고, 영화를 관람하면서 타인을 몰래 엿본 나는 허락도 받지 않고 위로를 받는다.
그렇다고 예술이 답을 주진 않는다. 오직 나의 움직임과 함께 울릴 뿐이다. 옥상달빛의 노래는 솔직한 담담한 가사여서 위로받고, 아이유의 노래는 우울해도 삶을 살아갈 의지를 들려주어서 기쁘다. 제이레빗은 그래도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힘을 얻고, <그냥 사랑하는 사이>와 <마녀 보감> OST는 운명적인 이심전심과 타인을 의지하는 힘을 표현해 주어서 감사하다.
볼빨간 사춘기는 때론 밝게 때론 어둡게 그대로 그려내어서 희망이 생기고, 악동뮤지션의 노래는 작은 것에서 작고 아름다운 세상을 발견해 주어서 고맙다. 그리고 Jess Glynne의 노래는 항상 다른 시선을 향하게 해주어서 새롭고, Sara Bareilles는 당당해지라고 말해주는 누나 같아서 좋다. Pentatonix의 화음과 편곡은 귀가 즐겁다.
마지막으로 Adele, Regina Spektor, Rag'N'Bone Man, Jess Glynne가 내는 특유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노래는 항상 마음을 신선하게 한다.
이것들이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다. 다 소개하지도 못했고, 당연히 어느 때 자주 듣는지도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얘기해주고 싶다. 커트 보니것이 말했다고 한다.
잘하든 못하든 예술을 하면 영혼이 성장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르세요. 라디오 음악에 맞춰 춤을 추세요. 이야기를 하세요.
네, 그 말을 받들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나는 요즘 이야기를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