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에 관하여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사라질 순간이 떠올랐다. 가슴 한편이 먹먹해진다. 시간이 다하여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 않다. 갑작스러운 에필로그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조금 더 큰 범위의 종말을 말하려는 중인가 보다.
'나'는 단 한 번도 동일하게 존재한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 익숙하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조금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 점은 단 한순간도 어김이 없다. 그런 의미로 난 매일 죽는다. 매 순간 종말을 맞고 다시 태어난다.
여기서 잠깐 스스로에 관하여 질문해보자. 나는 누구인가?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대부분 사회적 속성에서 기인한다. 쉽게 말해서, '나'는 관계 속에서, 공동체 안에서, 혹은 특정한 범주로 묶인 '보편' 안에서 정의된다. 홀로 존재하면서 자신을 정의 내리긴 너무 어렵다. 개성 혹은 성격이란 말도 비교로 정의된다. 남과 어떻게 다른가, 혹은 남에게 어떻게 대하는가에 대한 태도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매 번 낚싯대를 인생의 강가에 앉아 던지는 꼴을 취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 걸려주기를 바라면서 자신과 무언가를 묶어줄 또는 운 좋게 낚아줄, 수면 위의 찌를 '둥둥' 쳐다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이 없음이 일생의 진리며 잡힐 만한 것도 잡히지 않는 게 일상의 미덕이라면 우리는 가끔 존재의 공백기를 거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하고 정의 내리고, 받아들이고 수용할 만한 그 무언가를 잃어버린 느낌은 그러기에 너무 당연히 찾아온다.
당연하다 여기던 것들이 사라진 '순간'이 너무 길어져버려서다.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구여야 하지?
답이 있을까 싶지만, 나의 답은 당신은 '누구'일 필요가 없다, 이다. 당신에게 있는 자아라는 개념이 당신이 지속되고 있다고 속이고 있을 뿐, 당신은 다시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일 필요가 없다. 방금 전에 당신이 누구였던 것과 상관없이.
나는 혁명이나 개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다만 당연하다 여겼던, 당신을 묶어주던 매듭이 풀리던 날이 오면, 그리고 그것이 찰나가 아닌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의 깊이만큼 늘어지는 시간과 함께라면 이것을 기억하면 좋겠다. 당신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부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