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가 주는 무게

삶이든 죽음이든

by 쓴쓴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성서에 나오는 한 글귀로 유명한 이 말은, 그 전후 사정을 살펴보면 오싹하다. 예수는 세례를 받은 후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사명을 깨닫고는, 그것을 실천하기 전에 금식을 한다. 스스로를 극단의 상황으로 몰고 가는 상황에 악마가 찾아와서 시험을 낸다. 네가 정말 신의 부름을 받은 자라면 이 돌을 빵으로 만들어라. 이때 예수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 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로 산다.


이 이야기가 무서운 첫 번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신의 아들로서 부름을 받고 신의 뜻을 깨달은 자도 악마를 만난다는 사실이다. 모든 존재를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존재의 이유까지 이해하여 모두를 품은 자도 '악'을 마주한다.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품으려 하기에 버젓이 찾아오는 악을 그저 물리칠 수 없다. 그것, 혹은 그마저 감내해야 한다.


신의 아들로서 부름을 받고 신의 뜻을 깨달았으며, 모든 존재를 알고 존재의 이유까지 이해하여 '악'마저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던 자가 처음 했던 행위가 스스로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는 사실이 두 번째 오싹함이다. 이것이 왜 무서운가, 는 예수가 악마에게 건네었던 말과 연결된다. 우선 우리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빵의 존재 목적을 몰랐을 리 없다는 사실을 유추해낼 수 있다.


얼핏 보면, 그의 금식은 마치 빵의 존재 이유를 폄하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살게 하고 살찌우는 음식이 끊긴 공백의 시간을 '악'으로 채우지 않고 신의 입으로 메운다. 상황이 역전된다. 빵이 들어가지 못한 입에서 신의 말이 튀어나온다. 삶이 그치고 죽음이 시작될 것만 같던 곳에 신이 강림한다. 마치 예수가 일부로 악마를 끌어들인 것처럼 보인다. 깨달은 자가 스스로를 게워내고는, 텅 빈 무無의 시공간에 의미의 빛을 비춘다.


사람은 빵을 먹으며, 신의 말을 뱉으며 산다.


우리는 삶을 무심히 받아들일 수 없다. 너무 소중하다 못해 하나밖에 없는 이 생生이라는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빵을 먹인다. 하지만 그것뿐이 아니다. 당신은 이미 신의 말을 생이라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나'의 삶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의 태도는 각자의 입에 신을 소환한다. 지나쳐버린 바람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찾는다. 땅에 붙어있는 존재들은 하늘 멀리 흩어져버릴 매일의 조각들에 무게를 부여해 기억의 지면에 고정시킨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고민하는 이유가 꼭 여기에 있다. 의미가 없다면, 그냥 흘러가버릴 무언가라면 아무거나 선택해도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삶은 그럴 수 없다. '나'의 입은 빵을 삼키기만 하는 입구가 아니라, 신의 말이 쏟아져 나올 의미의 출구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만큼이나 죽음이 두려운지도 모른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가벼운 무언가가 죽음이다. 모든 무게를 앗아가, 마침내 다 해체시켜버리는 필연의 무無다. 단단히 묶었던 의미의 매듭이 다 끊어지고, 삼켜왔던 빵의 목적이 무의미해진다. '악'이 다시 찾아온다. 그때는 돌로 만든 빵이 있다 해도 소용없다. 아니, 그는 돌을 빵으로 만들라고 요청하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은 곧 소멸할 예정이다.


아, 그러나 당신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 당신이 '만든' 빈 시공간에 신의 말이 남기에 그렇다. 의미의 빛들은 어둠에게 틈을 내주지 않을뿐더러 그러지 못한다. 상황이 전복된다. 사람의 흔적마다 신이 나타난다. 흩어져버릴 줄만 알았던 먼지와 같은 기억들이 모이고 뭉쳐서 사람의 마음마다 무게감 있는 존재로 나타난다. 그리하여서 비어 있는 시간마다 삼켜진 공간마다 다시 채워지고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