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경계에서

이 곡이 좋다고 말하기까지

by 쓴쓴

노래도 글이나 말처럼 누군가와 함께 공유돼야 하는 것이어서 부르는 사람 마음대로만 해석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흔해 보이는 사랑 이야기의 가요가 싫었다. 그런 종류의 들끓는 감정은 나와 맞지 않았고, 가져본 적도 없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우정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고, 사랑이라고 하기엔 힘을 뺀 관계가 분명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거라 여겼다. 비록 상상의 것일지 몰라도, 그것을 좋게 여겼고 그런 만남을 추구했다. 물론 그런 사이를 가져봤는지는 확답할 수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나의 성장기에는 대중가요가 끼어들 곳이 별로 없었다. 때문에 안타깝게도 레트로라고 하면 어느 정도 알아듣고 반가워해야 할 것 같은 세대가 되었으면서도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청소년기에 가질 만한 노래에 얽힌 추억이나 사연 하나 찾기 어려운 이유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빠른 박자의 노래보다는 발라드와 같은 서정의 향을 풍기는 노래를 들었고, 반복되는 가사보다는 의미 있는 서사와 아름다운 묘사로 이루어진 음악을 주로 찾았다.

결국 음악 편식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걸러야만 하는 노래가 많았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배우는 좋은 기회를 얻었으면서도, 고전과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오래된 음악을 접할 때 힘들었던 부분은 가사가 있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이었다. 단어의 조합이 가져다주는 직관적인 이해는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작곡된 배경과 의도를 익혀야 한다는 강박은 길고 깊은 역사 앞에서 곧잘 권태로 빠졌다. 때문에 음악을 배우는 동안 기술과 기교를 습득하고 감탄하는 데만 집중했던 것 같다.




다행히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장르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여러 색채의 음악이 대중매체에 노출되었다. 그러다 보니 감상의 진취성에 관하여서는 최근에 알아챘다. 듣는다는 행위가 그저 모방을 위한 수동적인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던 과거의 단념은 섣부른 결정이었다. 들음이 매우 자신을 잘 나타내는 선택인 것이 분명한 이유는 독서를 하는 목적과 거의 동일하다. 책을 골라 집어 들고, 책장을 펼쳐 문장을 읽어 내려가는 일련의 과정 속에는 '읽기'와 '책'을 모두 사랑한다는 기본적 가정이 깔려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 책'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보겠다는 의지의 발현까지 들어있다.


그런데 감상이란 무엇인가. 보통 '듣기'란 우리가 볼 수 없을 때조차 저절로 행해지는 연속적인 과정인데, 그 시간의 흐름에 분절을 주어 특정한 '곡'만을 이해하겠다는 의지이므로, 취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셈이다. 그렇게 나는 무언가 그곳에 있음을 찾아냈다. 무의미로 가득 찬, 아니 무의미하여 텅 빈 세계에 나의 의미를 발견하고 채워 넣을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본인은 내면의 나를 찾아내기 위해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어려서부터 향취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부해왔던 까닭도 있다. 이른바 매우 보통의 존재로 남고 싶었다는 말인데 누구의 눈에도 띄고 싶지 않고 별 일, 별 탈 없이 살아가다 아주 조용히 세상을 떠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았던 꼬마 철학자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삶에 의미를 추구하는 한 인간으로서 태어난 이상, 조금 힘을 덜 쓰면서 살고 싶은 애어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반동이었을 것이다. 견디기 어려웠던 여러 사건들을 거치며 보통이 되기 어려웠던 상황을 이미 직감했던 것일 테고, 살아간다는 게 머릿속 바람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을 깨우쳤을 뿐이었다. 아름다운 미래를 그리기엔 뭐든지 막막했을 테니 말이다. 그 와중에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란 어려운 일이고 차라리 '사람은 무엇인가'라는 보편적 의문이 더 알맞았을 테다.




그러기에 인간에 대한 관심과 선의, 때 이른 긍휼과 같은 감정은 왜곡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것은 폄훼는 아니었겠지만 지나친 곡해였고, 바닥 없이 추락하는 회의주의의 나선이었다. 자신의 경험과 아픔을 모두에게 적용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는, 타인의 행동과 감정을 그 이해의 범주 내에서만 바라보려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그런데도 안타까운 희망이 하나 있었다면, 세상은 그리 무심하지 않을 거라는 가정이었다. 더 나은 날이 오기란 쉽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좋은 마음들의 의지가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막연하고도 무책임한 기대가 있었다.


잘 알려진 데미안의 구절, 알은 하나의 세계이고 그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말. 그러나 평범한 사람이라면 대게 세계의 붕괴를 경험하는 게 더 현실에 가깝다고 본다.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개척하는 초인은 드물다. 결국 나도 초인은 아니었고, 다른 의미의 보통의 존재가 되어 끝없이 빠져들 것만 같았던 나락의 바닥에 도착했다. 혼란스러운 사회를 경험하면서 나를 위로하는 목소리를 찾아야만 했다. 이전의 느슨한 가치체계로는 스스로를, 또한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듣기 시작했다.


어떤 가수의 곡조와 가사는 나를 너무 울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눈물이 다시 나를 살게 했다. 이것은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는데, 그때 들으며 느꼈던 부질없음과 나약함, 무력감은 이전에 생각해왔던 무의미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런 비유가 어울릴지 모르겠지만 이전엔 무채색이라고 불릴 수도 없었던 투명한 무엇이었다면, 우연히 찾아낸 그것은 검은 스케치와 같은 것이었다.


막연한 기대와 선의로 독학한 희망이 아니라, 누군가의 세심한 관찰과 애처로움으로 버무려진 짤막한 설득이 더 좋았다. 그것이 공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공명은 혼자선 일어날 수 없으며, 간절한 기다림과는 달리 사람의 내면에선 흔치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그렇게 난 우물에 비춰왔던 달을 보았고, 바깥으로 나갈 채비를 하였다.




이제야 아는 것들이 있다. 이 말은 항상 본인의 경험을 벗어나는 세상이 저 너머에 있으며, 그 너머에 도착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알아채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경계에 서게 된다. 본인이 아는 선 위에서만 이해하게 된다. 그럼에도 세상은 생각보다 조금 친절해서 여러 선을 교차시키며 간단한 밑그림을 보여준다.


그런 기가 막힌 우연들 속에서 나만의 색을 그려낼 기회를 얻는다. 쭉 뻗은 직선만을 그리려 애써왔던 시도들을 되짚어보면 폐곡선으로 묶인 곳에 그럴듯한 곡조로 색을 채우고 입히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운 좋은 일이다. 그러기에 이해되지 않는 영역이다. 해석이 되지 않는 순전히 기호의 지배를 받는 '보기에 좋은 것'이다. 그렇게 나는 사랑하는 음악을 찾고, 간혹 같은 노래를 듣는 존재들의 세상을 발견하고야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