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을 좋아하는지 몰랐다고 말하면 가족들은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얼마나 먹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흔한 것조차 몰랐다고, 그러니까 아주 보편적인 먹거리를 네가 좋아할지 몰랐다는 말을 믿겠냐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생각해보건대, 만약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과연 자신이 빵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을까 떠올려보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금세 추론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구체적으로 떠올리며 호불호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본인은 분명 조금 더 과거의 사람보다 행운을 누리고 산다. 우연히 이 시기에 세상에 출현하여서, '빵'을 모르고 살았을 이들과 달리 달콤함과 씹는 맛을 누리며 살 수 있다. 본인이 얼마나 그것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얼마나 다양한 행복을 고를 수 있는지, 또한 어떤 것이 자신과 더 잘 맞는지 알게 된다.
우주라는 개념을 정의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의 총합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실제로 우주를 아는 게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존재 모두를 파악하기 어렵거니와 사실 무엇이 존재하는지도 뚜렷이 말하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는 이전보다 더 세밀하게 지식을 범주화하여 발달시켰고, 더 쪼개어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모든 것을 아우를 만한 보편성을 찾으려 해왔다.
하지만 모든 것 안에 내재해있는, 혹은 모든 것이기도 한 무언가를 완전히 알아내었다고 해도 우리는 전체를 알 수 없다. 모든 것들 간의 관계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큰 그림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도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이내 막대한 양의 정보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빵은 생각만큼 보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시간 축을 따라서도, 장소 면에서도 누군가에게 빵은 너무도 낯선 것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겐 분명하게 자신의 기호를 집어낼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다.
가끔 왜 다양성에 관한 인식을 넓혀야 하는가, 곧 왜 본인에게서 타인에게로 넘어가는 관심의 확장을 당연히 해야 하냐는 물음과 직면할 때가 있다. 본인의 결정과 행동의 이유를 찾으며 드는 의문이자 지나친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특정한 상황에 놓이며 들었던 반항심이기도 하다.
그것에 답한다면 나는 아마도, '나'라는 존재들이 더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말할 것이다. 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관해 답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행복을 느끼는 영역을 확장할 수 있으려면 오늘보다 내일 더 타인이 내는 목소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논증하려 할 뿐이다.
삶에 대한 격언 중에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는 문장이 있다. 이 말은 이해하기 쉬운 것인데 세상에 갑자기 던져진 것만 같은 '나'를 파악하려면 다양한 존재들과 관계를 맺어봐야 한다는 생각이다.
다시 빵으로 돌아가겠다. 만약 빵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것의 영향력만큼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일부를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그러기에 조금이라도 더 다양한 것이 존재하고 생겨날 수 있도록 장려하는 편이 좋아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나를 나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
간혹 이 지점에서 폭력을 발견한다. 세상에 앞서 등장했거나, 앞서 이해받은 것들에서 자신의 정체를 발견한 이들이 본인에게 내려진 정의를 기본이자 자연스러움이라고 하는 경우가 그렇다. 이는 자신의 발견이 전부이자 우주라고 여기는 비약의 신념으로서 행복을 조금 이르게 찾은 자의 이기주의다.
행복을 찾는 방법으로 여행을 추천하곤 한다. 결국 다양한 경험을 위해서라는 것인데, 그런 까닭이라면 먹는 것도 괜찮다. 첨언하자면, 나는 오늘 먹어보지 못한 것을 선택해보려고 차를 타고 가다 내려야만 했다. 새로 개업한 수제빵집에 들어가 호기심을 따라 이것저것 골라 담아 봤다. 와중에 시그니쳐 메뉴라고 하는 '크루아상 식빵'도 구매했다.
계산대에 서서 봉투를 가득 채워가는 빵을 보면서 아낄 줄 모르고 사 왔냐는 말을 들을까 봐 좀 겁이 나긴 했지만, 오늘의 행복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게 나의 분명한 의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