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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쓴쓴 Aug 03. 2020

호접지몽의 위안

덜 생각하는 게 나을까 생각하는 존재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들어 무언가 정리되지 않는 내면을 느낀다. 깨어있는 동안 집중하기도 쉽지 않고, 잠을 자면 늘 꿈을 꾼다.

이전에는 기억나던 꿈 내용들이 있었고, 일상의 면면에서 어렵지 않게 연상되는 것들이 있어서 혼자 무의식을 분석해보며, 어지럽고 복잡한 삶을 토닥거리며 다져갔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은 무엇인가 싶을 정도로 이상한 것들을 꿈에서 목격하고 깨어나면 멍 때리다가, 일어나서 자기 직전까지 세상에 반응하는 나 자신의 여러 모양새가 이해가 되지 않아 괴로웠다.

그래도 조금은 성과가 있었던 게 있다면, 내가 종일 화가 나있다는 자각이었는데 핵심 대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사실로 당혹스러워졌다. 이 화가 자꾸만 어딘가로 달라붙어서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말을 안 듣는' 블라인드에게 화를 냈다. 난 바깥을 보고 싶다고! 웃긴 상황인 걸 알면서도 속으로 징그럽게 말 안 듣네, 하며 투덜대었고 실은 이렇게 말을 안 들은 지가 최소 삼 년은 되었다는 노후화된 블라인드의 처지를 잘 알면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격언이 있다. 이 오래된 말을 실제 생활에 적용해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구들이 그렇듯이 좀 더 뚜렷하게 이해해보려 하면 그 선명도가 갑자기 떨어진다. 주관적인 경험이나 개인들의 공통된 느낌이 집약된 속담과 같은 것은 인간 세계의 사건에 적절한 비유와 설명을 제공해주는 현자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객관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입장 불가 손님과 다름없다.


약은 모르는 상태와 동떨어진 개념이다. 약이 약으로 존재하려면 최소 두 가지 앎이 필요하다. 첫째, 어떤 생물체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우선 알아야 하고, 둘째, 그 증상을 호전시킬 약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병의 유무를 알지 못하면 약은 쓸모가 없으며, 뚜렷한 몸의 이상신호를 알아차려도 약의 존재를 모르면 약은 있으나마나이다.


그러므로 무지가 무언가를 해결할 가능성을 지녔다는 말은 객관의 세계, 곧 충분한 사람이 보기에 그럴듯해야 하는 곳에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문제가 있다는 미세한 알아챔이라도 있어야, 해결책이 등장할 수 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거나 심지어 있는지도 모르는 매듭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풀 수 없었던 신탁의 매듭을 칼로 내려친 알렉산더의 행동에 관한 논의는 차후의 이야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선조들이 그러했듯이 무지가 세상을 편하게 한다고 믿어 왔다. 특히 사회생활이라 불리는 영역에서 자주 통용되는 개인들의 공통된 신념이다.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라고 한다거나, 괜히 나서서 손해보지 말라거나,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라고 한다거나, 그런 따위의 것들이다. 덮어두면 지나갈 수 있을 것을 그 동기가 무엇이든 드러내어서 가만 놓아두어도 혼란스러운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사회의 분위기와 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흔들어 놓는다는 뜻일 테다.




아는 게 힘이라는 상반된 내용의 격언이 있다. 이것도 파악하기 쉬운 직관적 개념을 담데, 인간으로서 삶을 헤쳐나가고 무시받지 않고 너 자신으로 살아가려면 지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지식은 불확실한 세상에 나타난 무기와 같다. 굳이 비유하자면, 마치 등불이 달린 창과 같아서 어두운 밤의 숲을 통과해야 할 때 나의 발보다 조금 앞선 공간을 미리 보게 해 준다.


그러나 여기 지식의 저주가 있다. 앎이 도리어 사람의 시야를 좁혀서 무언가를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공유하지 못하게 되는 현상을 말하는데, 알면 알수록 대답할 수 없는 게 적어지거나 혹은 말할 수 있는 것은 산더미인데 듣는 사람이 알기 어려운 것들만 가득한 경우다.


여기에 다시금 주관의 세상이 나타난다. 모두가 명백히 알 수 있을 거라 여긴 객관의 빛이 무지의 장막을 넘어서질 못한다. 세상의 분명한 반영이라 여긴 지식이 문제의 일면만을 볼뿐만 아니라 역으로 그림자를 지게 하여서, 파악하지 못한 영역마저 덮어버린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된다.




현재 우리가 사는 곳을 살펴보면, 단 한 사람이 다 가질 수 없는 지식들이 그 세를 늘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하나의 반증이 되어서, 이 세계가 특정한 시선만으로 이해될 수 없음을 알려주기 때문에 만약 모든 내밀한 것들을 알고, 그 모든 것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분명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것은 성취할 수 없는 것에 관한 경외심일 수도 있고,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 주어져도 다 파악할 수 없다는 좌절감일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용기를 내려는 이는, 자신의 욕망을 포기해야만 존재 자체에 주어진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성찰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더 나은 지식이 있을지언정, 절대적으로 객관화된 것은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꿈 이야기와 화로 가득한 일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면, 글쎄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게 이 학계의 정설인 셈이다. 그나마 위안을 얻는 부분은 현재 조금 아프다는 상태를 인지한다는 점과 이 복잡다단한 글을 쓰면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조금 해소된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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