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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쓴쓴 Apr 30. 2020

읽으려 할 때는

문자주의는 피하세요

읽기에 관하여 굳건한 전통을 가진 듯하지만, 실은 자의적인 데다 배타적이어서 꾸준히 부정되었던 관점이 존재한다. 무언가를 적힌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시점인데, 이른바 문자주의다.

모든 읽을거리는 독'해'를 거쳐야만 하고 내포되거나 펼쳐진 문화는 공간적일 뿐만이 아니라 시간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조금 과장하면 어제 쓰인 일기도 오늘은 새롭게 읽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의무가 아니라 관찰된 현상에 가깝다. 결국 새로이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과연, 온몸과 마음에 과거의 흔적을 안고 회상이라는 능력을 지닌 채 현재를 일구어야 할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떠할까. 자신 구석구석에 새겨진 글들을 새롭게 읽을 수 있을까.

심리학은 사람의 어린 시절을 주목한다. 단지 바라보는 정도가 아니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까지 해서 의견은 천차만별이지만 유년시절의 무언가가 성인의 행동과 습관, 감정과 생각의 지도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상담을 하면서 본인은 줄곧 과거에 묶인 이들을 보았다. 그것은 상처, 그림자, 어린아이 등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해 과정 없이 보면 그냥 고집이다.

삶을 '가둔' 틀을 바꾸지 않으려는 고집. 상처에 붙인 밴드는 언젠가 떼야하고, 그림자는 본디 가둘 수 없으며, 어린아이는 반드시 자라지만 익숙한 게 좋은 법이다.

이때 성숙은 아픔을 요구한다. 상처는 흉터를 남기고 그림자는 자리를 옮겨 새로운 모양을 그린다. 이 와중에 무럭무럭 자란 어른은 자신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힌다.

이제 새롭게 읽을 차례다. 흉터에 깃든 이야기를 찾아내고 움직인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나를 보호해주었던 울타리를 걷어차야한다.

아,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삶을 있는 그대로 읽겠다는 문자주의를 표방한 이들은, 심지어 그대로가 무엇인지도 모르겠지만, 갇히기를 선호한다. 그래서 자신이 내린 오래된 결정, 끓어오르는 감정, 타인의 시선, 돌이켜보지 못한 신념, 비판 없는 종교적 믿음에 스스로를 가둔다.

이것은 본인도 마찬가지다. 부단히 나 스스로를 알아차리고 마음과 몸의 상태를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인간이란 존재에겐 과거라는 유산 말고는 현재를 해석할 편리한 도구는 없다.

그럼에도 인간의 창의력을 믿는 편이다. 모방과 개조에 능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방과 개조 모두 타인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일일신 우일신이란 말을 떠올린다. 자신을 채찍질하여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산업사회의 구호 따위로 대입할 게 아니라, 과거가 괴롭히지 못하도록 자신을 잘 돌보고 아끼라는 현인들의 이야기로 읽으면 더 낫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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