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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쓴쓴 Aug 15. 2020

색이 사라졌을 때

밝은 것을 쫓아 선명해진다

어지러운 마음을 쌓게 되는 때는 거의 밤의 시간이었다. 어둠. 모든 살아있는 것이 잠이라는 달콤한 어둠을 쫓아갈 적에 나는 곧잘 생각에 불을 켜고 반사되는 안광에 의지해 걱정과 울분을 토해내었다. 이때는 색상을 잃어야 하고 명도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명히 드러나는 것이 있다.




최근의 어떤 논박은 '블랙페이스가 역사적 맥락을 가진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전제 위에서 이뤄져야 할 것 같다. 여기서 역사적 맥락은 북미로 대표되는 특정 지역적, 문화적 한계와도 같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한국의 한 고교에서 일어난 이 '패러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 처음 전제로 돌아가면 블랙페이스는 인종차별로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육은 해당 인식의 기반이 될 지식을 가르치는 데 부족함을 드러냈다. 사진 속 주인공들은 학생들이었고, 배경은 학교였으며 졸업이라는 교육체계 속의 뚜렷한 의식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우리는 응당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이 과연 의도적이었을까. 이 사건을 마주한 사람들 대부분이 거의 아닐 거라고 믿는 듯하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이들의 행동이 역사를 알지 못해 벌어진 차별이었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학생에게 그 책임을 묻기보다 교육이라는 것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간혹 '패러디'의 당사자 분들이 재미있었으며 감사하다고 했으니, 괜찮은 것이 아니냐고 되묻기도 한다. 당사자가 중요하다는 의견을 따라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 그분들은 블랙페이스가 인종차별이라는 사실을 알았을까, 몰랐을까. 몰랐다면 피차 편할 일이다. 서로가 차별했는지 당했는지도 모르고 웃고 넘어갔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 파악은 지나치게 유토피아적이다. 남의 피부색을 무작정 따라 해도 어떤 위협, 수치심, 분노, 두려움이 일어나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현 세상이 아니다. 이미 차별의 역사를 알고 이를 마주한 우리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지나쳐 보낼 수 없다.

이와 반대로 그분들이 블랙페이스가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찮다고 했다고 가정해본다. 그리고 잠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생각한다. 누군가가 당신의 무례를 보았으면서도 웃으며 넘어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용서를 구하지 않았는데도 당한 자가 먼저 용서했다.

여기서 끝이 나선 안 된다. 타인의 발을 모르고 밟았더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윤리를 우리는 안다. 밟힌 사람이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더라도, 당신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더라도 사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여기에서 당사자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밟힌 자가 불쾌한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생각해보면 인권 투쟁이 그래 왔다. 역사적 사건으로 드러나게 된 차별에 대항하는 목소리와 실제 차별 사이에는 시차가 존재했다. 또한 개인적 경험은 모이고 모여 언제나 공동의 경험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니 '지금', '당사자'가 불편을 호소하지 않는다고 하여서 넘어가도 된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의 후손으로서 너무 비겁한 발언이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가, 밟은 행위를 지적했다. 그러자 주변의 보행자들이 손가락질의 타당성과 권위에 관해 의문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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