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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쓴쓴 Aug 13. 2020

좀 더 나은 것은 무엇인가

거리두기의 윤리

다소 과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2020년은 훗날 21세기를 21세기스럽게 보이게 한 역사적 순간으로 평가받을 것 같다.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고 생각했던 국제적이자 국지적인 위기 앞에서, 다양하게 나타난 사람들의 선택들이 어떻게 인류의 미래를 결정했는지 다음 세기의 몇몇 어린 사람들은 이해해보려 애를 쓸 테고... 아마도 얼마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거나, 헤아려보지 않아도 될 당연한 것이라며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쯤 또 누군가가 가르쳐주겠지. 인류는 생각보다 똑똑하지 않아서 이렇게라도 배우고 경고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과오를 또 저지를 것이라고. 그리고 지적해줄 것이다. 지금 21세기를 잘 배워두지 않는다면, 실수라고 에둘러 기록할 수라도 있었던 인간의 역사는 곧 끝이 날 것이라고.




코로나는 지금을 코로나 시대라고 명명할 정도로 여러 것들을 바꿔놓았고 앞으로도 분명 많은 것을 바꿔놓을 거라 예상하게 한다. 하지만 의외로 바뀌지 않는 것들 때문에 살아있는 것들을 더 괴롭게 하는데, 이를 테면 인간의 태도와 같은 것이다. 손바닥 뒤집듯 바뀐 환경 속의 손쉽게 바뀌지 않는 사람의 욕망이란. 보이지도 않는 작은 RNA 몇 가닥이 비춰준 것은 인간의 나약함이나 무지라기보다는 인간의 악함이다.

뉴 노멀(New normal)이라는 용어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이기적 욕망이다. '새로운 정상적 상태'의 도래를 받아들이든, 그렇지 못하든 욕망의 방향은 부동의 나침반이다.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의 극단은 마스크 쓰기를 거부하는 태도로 드러난다. 이는 매우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코로나 사태가 사회적 위기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의 발현이다. 이것이 왜 이기적 욕망인가에 대한 대답은 단호할 수밖에 없다. '나만 아니면 돼'이기 때문이다. '병 걸림의 여부는 내가 선택하고 나만이 결정할 수 있으며 어쩌면 네가 병에 걸리든 관심 없고, 느낌상 난 안 걸릴 것 같다.'

현 실태를 받아들인 경우는 셈법이 빠른 경우로 '새로움'에 적응하여 잠시라도 우위를 점하려는 태도로 나타난다. 살아남으려는 위기 대처능력을 탓할 필요는 없지만 살아 '남으려는' 것이 자신에게만 국한되기에 문제가 된다. 이것 또한 구체적인 결정으로, 사태 초기에 나타났는데 마스크 품귀현상이었다.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제품을 알면서도 판 것, 재고가 있으면서도 가격을 높이려고 매진이라 속인 것, 이 둘이 겉으로 드러나는 대표적 문제였다. 하지만 아마도 사람들은 이것이 시장논리와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을 테다.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필수품이 그렇게 취급받는 것은 부당했다. 돈생존 욕구 폄하고 생존 여부 불투명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




코로나가 밝혀준, '나'들만의 행복 추구가 나타난 사회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인류에게 필요한 것은 윤리다. 새로운 윤리체계를 세울 필요는 없다. 우리가 지금까지 발명하고 투쟁하여 지켜 온 윤리로도 충분할 것만 같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은 지금의 상태는 무엇 때문일까. 이유는 자명하다. 윤리 따위는 너무 따분하고 귀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배우고 이해하고 지키려면 겸손히 듣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게 우선이지만, 가만히 앉아 상대를 지켜보려면 시간이 필요하기에 윤리는 결국 너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며 괴로운 것이기만 하다.

하지만 무궁한 발전과 풍요의 축복 안에는 '더 나은' 것이라는 개념이 포함돼야 하지 않을까. 더 선하고, 더 가치 있는 것에 관하여 물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까운 현실은 무언가를 더 가질수록-그것이 권력이든, 명예든, 경제력이든-더 나은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아도 넉넉히 살 수 있고, 무언가를 덜 가질수록 더 나은 것을 고민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때로는, 어쩌면 자주, 지금 당장 '나'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악하다 판단하게 되고 그것을 눈 앞에서 치울 수만 있다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가치 판단은 생각보다 늦게 이뤄지고, 심판대 앞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더 늦게 밝혀진다.

간혹 이 대목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다소 소름 끼치는 실례가 있다. (분명 이는 사족이다.) 그는 토론을 하자고 모인 자리에서 서슴없이 이 말을 꺼냈는데 자신이 종교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게 만드는 확진자들을 불도저로 밀어버리고 싶다고 했다. 또한 만약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계엄령을 내려서 진작에 확진자가 발생하는 도시를 봉쇄할 거라고 했다. 대화에 참여한 이들이 반발을 표하자 장난이라 에둘러댔지만, 그 내용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했던 것은 주변이 중 아무도 그가 평소에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말을 들었다는 누군가의 전언이었다.

지금이라도 나는 그를 이해하기를, 그가 일종의 투쟁을 하고 있다고 본다. 마스크로 상징되는, 거추장스러운 사회적 규약에서 자신이 벗어나려면 강한 불도저가 필요하지만 실제로 실행할 힘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그보다 훨씬 쉬운 마스크 벗기를 선택한 것인데, 그러니 실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이미 충분히 만족하고 있을지도.




언젠가 '인간의 존엄성이란 먹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이는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도 그 정신을 유지하고 맑게 해주는 경제적, 신체적 배경 및 인프라가 없다면 무용지물이라는 뜻이겠다. 이 말의 주인들은 이에 더해 이러한 해석도 덧붙였다. '남들 사는 데 신경 끄고 본인 앞가림 잘하는 게 상책이다. 먹고살려면 남이야 어떻게 살든, 너 자신에게 집중해라.' 사실 이 해석 앞까지는 현실적으로 당연한 말이어서 반박할 가치도 못 느꼈지만, 해석에 관하여서는 관련 명제를 줄곧 명확히 해두고 싶었다.


실로, 존엄성이란 먹는 '데'서 시작된다. 먹는 행위의 가장 기본 전제인 생존은 존엄과 함께한다. 생은 곧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이 현재 우리가 가진 윤리다. 천부인권부터 설명하기엔 벌써 입이 아플 정도며 확장되고 구체화된 인권은 지금도 끊임없이 쟁취된다. 그러므로 다음을 염두해야만 한다. 생존이 존엄에 선행하지 않고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면, 살아남는 것은 '홀로'의 쟁취가 되어선 안 되고 '같이'하는 연대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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