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화되는 것 외의 미지의 타인을 돌보는 일에 들어서면 자신에게 질문해보도록 요청받곤 하는데, 그럼에도 책을 즐겨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해보기란 어렵다. 누군가 먼저 질문해주지 않는다면 답해보기도 쉽지 않은, 탐험되지 못한 궁금증이다. 예전이라면 상상력을 키우기 위해서라고 답했을 것 같은데, 요즘은 하나가 더 늘었다.
최근 들어 가족이란 무엇일까, 고민했다. 나는 외로움보다는 고독에 익숙한 사람이라고 자평해 왔다. 그래서 굳이 누군가와 같이 산다면 차라리 동물이 좋겠다 싶었는데, 궁극의 결과까지 상상하고 마는 습관을 따라 사고 실험을 하다가 조금 서글퍼졌다.
나는 동물을 키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행복한 삶을 만들어 줄 자신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나보다 수명이 짧은 당신을 들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끝을 맞이할 자신이 없었다. 함께 애정을 나누던 존재와 너무 이르게 헤어져야 한다는 확정된 결과에 부담감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는 같이 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떠나보냄이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거의 끝이 확실하게 보이는 결정을 무모하게 내리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난 외롭지 않아, 라는 말은 거짓이었을까. 차라리 고독이 낫지, 외로움은 싫다고 마음이 떼를 쓴다.
그렇게 누군가와 같이 사는 것에 관하여 다시 생각해야만 했다. 불가항력적으로 빠르게 종료될 애정 기반의 상상 속 관계에서, 누군가를 애정 하고 싶다는 감춰진 이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독보다는 외로움, 외로움보다는 두려움. 관계를 맺는 것에 관한 두려움. 알 수 없는 이 불안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질문과 답 모두를 찾기 위해 여지없이 책을 찾았던 나는 책장에 꽂힌 책의 제목을 본다. 무엇을 찾고 잡으려 애썼는지 내면의 욕구를 읽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인데, 요즘은 '아픔과 함께 살기'인 것 같다.
글의 초두에서도 언급했지만, 책을 읽으며 상상했었다. 너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어떻게 어울려야 할까 상상했다. 쉐도우 복싱을 하듯이 미결정된 미래를 그리고 최대한 피하기 위해, 더 서글퍼지기 전에 적절한 결정을 하려 애를 써왔다.
다치고 싶지 않았던, 지식을 쌓는 열정의 이유에 더 나은 것을 더하고 싶어 졌다. 외로움을 모르지 않았다던 마음이 아픔에서 도망가게 하려고 책을 읽게 하고 싶진 않았다. 혼자 사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지금, 영원히 아프지 않겠다는 허언을 꿈꿨음을 알게 된 오늘, 난 가족을 꿈꾼다.
나는 너를 지킨다. 이 말에는 가족이라는 용어만큼이나 오해를 일으키는 의미가 많이 묻어있다. 하지만 이 선언만큼 분명한 존중과 사랑이 드러나는 고백이 있을까. 나를 지키려고 너를 피하는 일은 이제 하지 않겠다. 나를 지키듯이 너도 지켜낼 거라는, 폭력이 없는 확장된 '나'의 더 나은 선언.
너와 가족이 되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