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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쓴쓴 Aug 26. 2020

얼마나 더 미룰 수 있을까

녹아내리는 것들 사이로

얼마나 지탱할 수 있을까. 얼마나 미룰 수 있을까.




오래 썼던 냉장고를 교체했다. 일반 냉장고 하나와 김치냉장고 하나였다. 둘 모두 십 년을 넘게 썼던 터라 전력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용물도 많이 담아내질 못해서 조금 더 큰 냉장고 한 대를 주문했다.


삼십 도가 넘어서는 여름 날씨가 지속되었고, 더욱이 태풍이 상륙하기 직전이 뜨거운 바람까지 몰려오고 있기에 시간을 잘 계산해야 했다. 새 냉장고가 도착하는 시점에서 역으로 계산해 냉동실의 얼린 것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생각 외로 음식 재료는 많았고, 식탁을 넘어서 바닥에 쌓였다. 고작 몇 번의 들고 나름이었던 것 같은데, 그것도 일이라고 고질적인 요통이 왔다. 주방의 맥시멀 리스트가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다진 마늘, 쪄 놓은 옥수수, 손질해 놓은 해산물이 빠르게 녹아갔다. 무엇을 좀 먹자고 꺼내놓을 때는 해동도 잘 안 되던 것들이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킨 듯이 형체를 포기한 채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여름이란 이름의 폭군은 아주 빠르게 음식 재료의 신선도를 떨어뜨렸다.


와중에 녹아가는 것들 사이로 버려야 할 부패의 흔적을 보았다. 시간의 흐름을 가두어, 흙은 흙으로 먼지는 먼지로 가야 할 종말의 때를 미루려는 저온의 세계도 마지막을 막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모든 것의 운명이겠거니,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난 까닭에 줄어든 수명을 더 연장하지 못한 것은 모든 만물의 운명이겠거니 해야 했다. 뿌리는 뽑히고, 줄기는 꺾이며, 물 밖은 질식이다.




누군가의 주장대로 바이러스의 창궐이 인간의 탐욕이라 한들, 그 탐구 정신이 었다면 방역이라는 지식도 얻지 못했을 테다. 러므로 어떻게든, 살아감에 대하여 고민하며 이 시대의 답을 내려야 한다. 다만 그런 연유로 끊임없이 논해왔던, 왜 살아가는가에 관한 질문 점점 막혀만 간다. 천천히 녹아가는 것들 사이로, 부패하는 것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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