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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리면...

백 년 만에 소개팅

by 이너프

“이너프 씨는 뭘 좋아하세요? “

”저요? 책 읽는 거 좋아해요 “

”저도 독서 좋아합니다 “

오랜만에 들어온 소개팅 자리.

직업, 인성 모두 보장한다며 선배의 남편이

다리를 놔줬다.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고

주말에도 일하는 나 같은 프리랜서에겐

소개팅하기란 쉽지 않다. 선배의 남편에게

백번이고 큰절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다.


”저도 잘 모르는 레스토랑을 예약하셨네요 “

”네, 여기는 쉬림프 파스타가 맛있대요.

열심히 검색 좀 해봤습니다 “


광화문에서 일한다는 소개팅남은,

퇴근하고 내가 일하는 목동까지 와 주었다.

공대생 출신이지만 문과 감성까지 겸비한 듯했다.

레스토랑을 예약하는 센스에, 메뉴 선택까지 그 사람의 마음이 예뻐 보였다.


‘와 이번에 진짜인가 보다. 이제 시집가는 건가’


30대 넘어서면서 소개팅을 할 때면 김칫국 한 사발 드링킹 하는 습관이 있다. 되도록 상대방을 내 예비 남편이다... 생각하고 찬찬히 뜯어보고 맛보고~

좋은 점만 보려고 한다. 평소 잘 웃지 않은 성격 탓에 웃어 보이려고 너무 노력했는지 광대가 쥐가 났다.


”소개팅 많이 해 보셨어요? “

”저는 요즘은 많이 안 했어요. “


연애는 물론, 소개팅도 쉰 지 너무 오래됐다...

방송 작가가 바빠서 연애를 못 한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긴 하나 선후배들 중 바빠도 다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 보면 또 틀린 말인 거 같다. 전쟁 중에도 할 거 다 한다고 하지 않은가!


결혼 준비까지 모두 마쳤다는 이 남자. 이란성쌍둥이인 동생이 결혼을 해서 조카가 생겼는데 ‘조카 바보’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을 못 봤다.


‘가정적이겠다’

대화를 나눌수록 그에 대한 믿음의 성이 점점 높아지고 견고해지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음이 세차게 울렸다. 회사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온다는 건

큰일이 났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제작한 프로그램의 협찬사에서 방송에 대해

컴플레인을 걸었다며 메인 작가인 나보고 해결하라는 거였다.

‘왜 하필 지금이야’

굽신 모드로 여러 군데 전화를 돌리고

자리에 오니 벌써 20분이 지나서였다.

파스타 면발은 크림소스에 눌어붙어서 떡져있었다.

해결되지 않은 일 때문에, 그리고 매너를 밥 말아먹는 나 자신 때문에 입맛이 사라졌다.


”커피 한 잔 하실까요? “

눈치 보고 있는데 소개팅남이 먼저 2차 제안을 했다.

‘다행이다. 그리고 감사하다’

1차를 만회하려고 열심히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번에는 카톡이 연달아 온다.


‘우띠!!!!!’

애써 안 보려고 하는데... 소개팅남의 얼굴이 아닌 휴대폰으로 시선이 꽂힌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 특히 일 관련 톡은 묵히지 않고

오는 건 바로바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일복만 더 늘어날 뿐인데 늘 참지 못한다.


- 선배님, 큰일 났어요. 촬영하기로 한 섭외자가 펑크 났어요 ㅜㅜ


‘망했다... 왜 하필 소개팅하는 날, 이러냐고!


커피도 입으로 마셨는지 코로 마셨는지 기억도 안 난다.


”정말 죄송한데요. 지금 회사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서야 할 것 같습니다. “

”네, 오늘날이 아닌가 봐요. 얼른 가 보세요 “


내가 지금 후배에게 간다고 해도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책임은 다 해야 할 것 같아서

소개팅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때부터 내 머릿속은 내일 촬영 걱정뿐이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후배가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고 있었다. 이럴 땐 옆에 누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나도 겪어봤기에 후배를 외면할 수 없었다.


피말리던 시간이 지나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몇 시간 뒤 진행될 촬영 준비가 완료되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후배가 그제야 씩 웃는다.


”선배님. 그 남자 마음에 안 들었죠?

그러니까 소개팅 중간에 뛰어왔죠 “

”!!!! “



후배 말대로 정말 그랬을까? 여러 번 나에게 물었지만 아니다!! 다만 소개팅남에게 미안할 뿐이었다.

때문에 방송 작가의 나쁜 이미지를 심어준 것 같고,

무례한 태도에 용서받을 수 없었을 거라 생각했다.

주선해 준 선배에게도 소개팅에 대해 아무 말하지 못했다.


한 달뒤, 선배를 만나 그날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죄송하다고 전했다. 그러자 뜻밖에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람은 너 마음에 들었다는데? “

”네?? “

선배가 약속 시간과 장소만 알려줬기 때문에

서로 연락처를 모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바빠 보인건 사실이었으나 책임감 있게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는 것이다. 와... 이건 예상 못 했다.

그러나 그가 예의상 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진짜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면 나나 그가 소개팅 후

선배를 통해서 애프터 신청을 했었을 것이다. 나는 뭐 일치감치 망한 소개팅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했었기 때문에 염치는 챙겨야 한다 마음먹었다. 우리의 인연은 닿을 듯하다가 비켜나갔다.(사실될 인연이었으면 어떻게든 만났겠지.)


1년 뒤, 소개팅남은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선배에게서 전해 들었다. 정말 결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추진력이 남다르구나!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안녕~


그 후 소개팅 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도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 놓는다. 쳐다도 안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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