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선택] 한 여름 카페에서
밤사이 수백 번 뒤척거린 몸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몸은 일어났지만, 입안이 까끌까끌하고 정신은 몽롱하다. 이럴 땐, 카페인 수혈이 필요하다.
숨 막히는 더위와 내리꽂는 햇볕을 고스란히 피부로 받아 가며 아침부터 스타벅스로 향한다.
“따아 주세요”
더워 죽어도 ‘따뜻한 아메리카노족’인 나는 커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커피를 선택하는 나름의 기준이 있다. 원두 향이 고소하면서 신맛이 덜 나는 걸 선호한다. 바디감이 묵직한 걸 좋아하는데 스타벅스의 커피가 때 그 맛이다.
뜨거운 공기를 안고 들어온 내 몸이 에어컨 바람에 아직 식지도 않은 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컵을 받아 들고 2층 통유리창 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커피가 알맞은 온도로 식을 때까지 5분 정도 멍 때리면서 기다린다.
커피 한 잔 마시는 게 뭘 그렇게 유난이냐고 할 수 있다. 나도 안다. 그러나 나 홀로 커피를 마실 땐, 귀한 시간으로 여기고 최대한 즐기려고 한다. 커피 향이 코에서 온몸으로 퍼지면 그 뒤에는 입으로 한 모금 마신다. 커피의 뜨뜻하면서 쌉싸름함이 목젖을 거쳐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그렇게 카페인이 내 혈관을 따라 심장, 뇌, 발끝의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는 것 같다.
심장이 적당히 두근거리면서 뇌가 활동할 준비를 끝냈다는 신호를 보내면 수축했던 눈의 동공이 절로 커진다. 동시에 깨어난 나의 안테나가 가동 범위를 넓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흡수하고 있다.
내 테이블 옆에서는 남녀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 중이었다. 단아한 헤어스타일과 세련된 메이크업이 돋보이는 한 여성이 마주 보고 있는 50대 남자에게 뾰족하게 말하는 게 신경이 쓰였다.
"저도 산전수전 다 겪고 30대에 CEO 됐거든요.
얼마 전에 거금 주고 CEO들의 조찬 모임에 다녀왔어요. 근데 그 모임 후에 절 강퇴시키더라고요."
그녀의 대화를 엿듣는데 물음표들이 생겼다.
왜 강퇴당했을까? 조찬 모임의 참가비는 얼마였을까?
조찬 모임에선 어떤 대화가 오고 갔을까?
흥미진진해지고 있는 찰나 오른쪽 테이블에선 이혼숙려캠프의 클라이맥스로 진입했다
“남편이 언제 바람이 났나요?”
선생님은 증거를 많이 모으셨나요? 힘드셨죠...
일단 더 지켜봐야 해요”
한 여성이 바람난 남편을 둔 아내와 상담 통화를 하는 듯했다. 1시간 동안 3건 정도 비슷한 내용으로 통화를 하는 걸로 봐서는 이혼 전문 변호사나 상담사, 또는 유튜버로 추측했다. 나는 그녀의 통화에 꽤나 집중하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상담이 무료했는지 핸드폰으로 고스톱만 치고 있었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옛날 같았으면 진즉에 인터뷰를 가장해 대화를 신청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길에서 여장한 아저씨를 본 적이 있는데
쫓아가 블라우스는 언제부터 입었냐 등 질문하며 나의 물음표들을 지워갔다.
또, 지하철에서 건너편 자리에 앉은 젊은 여자가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딱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가 고백하듯... 수줍게 원피스의 구입처를 물었다. 나의 당황스러운 질문에도 흔쾌히 온라인 사이트를 알려주며 원피스에 대한 만족도까지 이야기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황당한 질문에 사람들이 초반엔 뭐지? 하면서도 답을 주곤 했다. 그러나 요즘 포교활동을 비롯해 비상식적인 사건들이 넘쳐나면서
뭐든지 조심스러워진 세상이 되었다. 모르는 이에게 말을 건다는 건 용기가 아니라 이제는 각오까지 필요해졌다. 그리고 얼굴에 깔 철판도 챙겨야 한다.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호기심이 아니다. 물어볼까 말까 수 백번 고민하고 있는 사이 그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 물음표를 해결하지 못해 아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돼서 홀가분해졌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들에게 티 내지 않기 위해 노트북 앞에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바삐 굴리고 입술만 더듬더듬하다 끝나버린 상황에 뒤늦게 머쓱해진다.
차마 말하지 못한...
그 질문을 여기에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