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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습니다! 프리랜서입니다

일하지만 돈은 없어요

by 이너프

북한산 뷰를 커피 마시면서 감상할 수 있는 스타벅스가 오픈했다고 해서 친구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움직였다. 차가 없는 뚜벅이들이라 힘들게 노트북까지 짊어지고 버스 타고 말이다.

오전 9시밖에 안 됐는데 여기 카페 맞나? 북한산이 잘 보이는 명당자리는 우리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들

차지였고, 엉덩이 붙이고 커피 마실 자리 조차가 없었다. 점점 다리도 아파오고 눈치 싸움에 지쳐갈 때쯤 친구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이야기했다.


“평일인데 이 시간에 노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나?

회사 안 가나?”

“우리처럼 프리랜서인가 봐”


그렇다. 나는 프리랜서다. 고용계약 없이 일하는 ‘1인 비임금 근로자’가 2022년 기준으로

847만 명을 넘어섰다고 하는데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프리랜서마다 다른 형태로 근무하겠지만, 비상근 방송작가의 장점을 꼽으라고 하면 옷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잠옷을 입고 일해도 되고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카페에서 가서 내 할 일을 해도 된다는 의미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없으니 지옥철을 타지 않아도 되고 이동하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영화 티켓을 제값 다 주지 않고 조금 저렴한 값으로 평일에 영화를 본다는 것도 가슴 뛰는 일이다. 또, 런치 가격으로 뷔페를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것도 참 마음에 든다. 체력과 능력이 된다면 프로그램 몇 개를 진행해 돈을 더 벌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다.


뭐니 뭐니 해도 프리랜서의 가장 큰 매력은 일하다가 만난 원수에게 스트레스받으며 평생 같은 회사에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방송작가는 팀 프로젝트로 조직되는데 짧으면 1개월에서 3개월, 길면 5년 이상 간다. 피디와 짝을 이루어 방송을 제작하기 때문에 팀워크도 필요하고, 회의, 미팅, 시사 등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일정도 있어 대인관계도 무시할 순 없다.


어느 조직이든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이상한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짝꿍 피디가 선을 자꾸 넘으며 나에게 더 많은 일을 요구한다거나! 부장이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내 마음을 알아맞혀 봐’를 시전 하며 기획안을 골백번 고치라고 한다면!!! 초장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만두는 게 좋다. 20년 이상 프리랜서

생활하며 터득한 것 중 하나는 쎄한 놈은 끝까지 이상하다는 것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건의를 해도 개선의 여지가 없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단 같은 이유로 메뚜기처럼

철마다 팀에서 나와 이동한다면, 그 또라이가 나인가? 확인할 필요는 있다. 방송계가 워낙 좁아서 한 다리

건너면 누구인지 거의 알 수 있어, 소문에 주의해야 한다.



방송국 시스템을 잘 모르는 친구들은 초반에는 나를 부러워했다.


“넌 좋겠다. 하고 싶어 하는 일 하면서 자유로워서”

친구들에게 이러쿵저러쿵 긴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냥 좋아 보이게 놔두는 것도 좋을 듯해서다.

많이 알게 되면, 좋아 보였던 내 직업에 대해 흠집을 낼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방송작가를 한 지

3년이 넘었을 때,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얼굴 보기 힘든 '작가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작가님, 이번 주말에 시간 되니?”

“미안해. 내 스케줄을 잘 모르겠어 주로 주말에 일하긴 하니까...”

“그럼 이번 달 말에 빨간 날은 어때?”

“나 빨간 날도 일하는데...”

“그냥 내년에 보자!”


내 시간인데도, 내 스케줄을 가늠하기 힘들 때가 많다. 기획 회의가 2시간 이내로 끝나지 않고 시상식도

아니고 1부, 2부로 갑자기 나눠서 하게 되면 철야는 기본이다. 촬영이 펑크 나거나 국가의 중대한 사건,

사고가 터지면 집에 있다가도 회사에 출근했기 때문에 주말에 쉬는 친구들과 만나는 게 쉽지 않았다.

호수 위 여유를 즐기는 백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살기 위해 미친 듯이 발을 허우적거리는 한 마리의

짐승일 뿐이다. 마감일이 다가오면 인간이길 포기하는 게 편하다. 3일째 머리를 감지 못하기도 하고

컴퓨터 앞에서 과자나 과일로 끼니를 때우는 일도 다반사다. 평일에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책을 보는 여유를 부리는 날이 바로 마감을 끝낸 후다. 그 꿀맛을 한 달에 3일 이내로 짧게 맛본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20년 넘게 프리랜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는가? 정시 출퇴근하는 직장인을 꿈꾼 적

있느냐고 질문한다면... 당연히 있다. 프리랜서의 삶에서 탈주하기 위해 화장품 회사의 마케팅팀, 홈쇼핑 영상팀에도 계약직으로 들어가 주말이 있는 삶을 누려봤다. 그런데 뭔가 답답하고 누가 보지도 않는데 날

감시하는 느낌은... 그냥 착각이겠지? 결국 연어가 회귀본능으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듯 나는 번번이 프리랜서의 삶으로 돌아왔다.


“00 씨는 방송 일이 재미있으세요?”

“네! 재미있어요!!”


소개팅할 때면 꼭 나오는 질문이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나를 보고 순간 깜짝 놀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내가 방송작가에 진심이라는 걸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나 혼자 진심이면 무엇하랴.

광고가 붙지 않으면 방송 제작이 어려워진 요즘, 프로그램이 제한적이라 방송작가가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다. 그나마 붙잡고 있는 밥줄이 있다면 다행이다. 협찬이 들어오지 않아 방송이 취소되거나 조기종영되는 일도 많다. 결방엔 페이를 못 받는 게 암묵적 계약이라 일시적 또는 그냥 백수가 된다는 소리다. 방송국 사정(?)에 이골 난 프로 백수가 프리랜서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위태롭게 외줄 타기를 하며 가늘고 길게 걸어왔다. 주변에서도 내 체력을 걱정하며 미래를 위해 빨리 제2의 직업을 찾아보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런데 가장 재미있는 일인 걸 어떡하란 말인가! 비록 대출받기 힘들고 4대 보험 혜택, 보너스,

휴가도 없는 프리랜서지만, 방송작가에 대한 나의 짝사랑은 계속될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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