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이 힘든 당신
K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을 열어 ChatGPT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늘의 일정을 묻자 화면에는 시간대별 계획이 정리된다.
“옷은 뭘 입지? 이런 고민하기 싫어”
카메라를 켜서 옷장을 비추니 화면 위로 오늘의 기온과 일정에 맞는 옷차림이 나열된다. 출근길에 차에 오르자, 내비게이션이 가장 빠른 길을 안내한다. 그녀가 고민할 필요가 없다.
K는 한때 결정장애라는 말을 들었다. 메뉴판 앞에 서면 늘 시간이 늘어졌고 고른 뒤에도 손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선택하고 나면 다른 선택지가 떠 올랐다. 그럴 바엔 남이 선택하는 걸 먹는 게 나았다.
회사에서 기획안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이것저것 내용을 담다 보니 요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AI가 분석해 주는 내용을 갖다 넣기만 하면 끝이다. 감정 소모도 줄었고, 남은 시간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볼 수 있다.
동료들과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 대신, 그녀는 AI와 대화하는 시간이 더 편했다. 필요 이상으로 묻지 않았고, 틀린 말을 하지도 않았다. 상처받을 일도, 책임질 일도 없었다.
저녁에 넷플릭스를 보며 밥을 먹고 있을 때, 시골에 있는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전화를 안받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비게이션을 켜 보니 서울을 빠져나가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린다. 지금 출발하면 여섯 시간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K는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익숙한 창을 열었다.
-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부조금을 얼마 내야 할까?
잠시 뒤, 화면이 진동하며 답변이 떴다. ‘마음이 많이 힘드셨겠어요.’라는 문장 아래, 관계별 기준 금액이 정리되어 있었다. 5만 원, 10만 원, 20만 원.
K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숫자들이 식탁 위에 놓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버지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고, 대신 빈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기준표를 다시 보지 않았다. 봉투를 집어 들고, 펜을 쥔 채 잠시 멈췄다. 이 선택만큼은 아무에게도 맡길 수 없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