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필유방
子曰(자왈) 父母在(부모재)시어든 不遠遊(불원유)하며 遊必有方(유필유방)이니라.
"부모가 계시면 멀리 나가서 놀지 않으며, 놀 때에는 반드시 있는 곳을 알려 드려야 한다."
논어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가 젊은 시절 이 내용을 읽었다면 그냥 무심히 넘겼을 것 같다. 옛날 유교적 고리타분한 이야기라며 비판했을지도 모른다(사실 한자가 있어서 그냥 스킵했을 수도). 어떤 책이든 때에 따라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를 수 있다. 소로우의 <월든>을 읽을 때 그랬다. 30대 때 읽었던 <월든>과 40대 때 읽었던 <월든>은 확연히 달랐다. 누군가의 모험으로 읽었던 30대와 고독한 향수를 느꼈던 40대가 달랐다는 이야기다.
논어에 나오는 유필유방이 그렇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처지가 되다 보니 와닿는 말이 되었다. 아이들이 조금 늦게만 와도 걱정이 되고 비만 와도 데리러 가야 하나 조바심을 내었다. 하지만 자식은 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 왜 그렇게 걱정하냐며, 왜 왔냐며 핀잔을 듣기도 한다. 그들은 부모가 간섭하는 것 같기도 하고 괜한 걱정을 한다며 부모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야 깨닫는 게 부모의 마음이다.
다 큰 자식 밤늦게 안 들어올 때, 끝까지 기다리며 마음 졸이다가 자식이 들어오고 나서야 잠자리에 드는 그 마음을 어찌 알꼬?
경로당에서 마트에서 받은 사은품으로 받은 비닐장갑과 휴지를 모아 자식들이 오는 명절까지 모아두는 마음을 어찌 알꼬?
손수 텃밭을 일구며 더운 여름에 수확한 야채를 보내기 위해 터진 박스에 꼼꼼히 테이프를 붙여가며 택배를 보내려고 어렵게 우체국에 도착해 삐뚤빼뚤 자식의 주소를 써 내려가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 알꼬?
김치 떨어질까 봐 아픈 허리 부여잡고 숨죽이고 양념을 묻히는 엄마의 마음을 누가 알꼬?
자식이 좋아하는 것 필요한 것 먼저 살펴 챙기다가 정작 자신은 늙어버린 그 모양을 어찌 알꼬?
사실 위에 언급한 이야기는 나와 아내의 부모님 이야기다. 본인들이 쓰는 수건은 우리가 봤을 때 걸레 수준임에도 고이 모아놓은 수건선물 박스를 가져가라며 건네는 게 그들이다. 부모는 자식만 바란다. 감지센서가 달려 있다면 몸의 신호는 온통 자식의 신호를 기다린다. 그래서 센서는 자식들에게만 반응한다.
하지만 자식은 다르다. 그들의 센서는 사랑, 취미, 친구, 자신이 즐기고 좋아하는 것들에 반응한다. 그래서 밥 먹으러 오라 해도 게임하느라 딴청이고 제 할 일이 끝내고 늦게 오며 가족 식사보다는 친구와의 약속을 더 기다린다.
공자 선생은 논어에서 한결같이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라고 한다. 효의 시작이 부모님의 마음을 앞서 헤아려서 살피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걱정을 안 끼치게 미리 염려 거리를 제거하고 기쁘게 해 드릴 일을 먼저 고민하는 것이 효도라고 했다.
우리 마음 안에 있는 분주함, 집착, 미움, 고집, 염려로 부모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면 잠시 멈춰서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 여유를 찾아야 한다. 인생이란 짧은 소풍에서 맺어진 연이 금세 지나가 아쉽지 않도록 내 생각만이 아닌 부모를 헤아리는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