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잠수복을 입은 남자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by 속삭이는 물결

5시간도 자지 못한 날. 부족한 수면 시간보다는 이틀 연속으로 자전거를 오랫동안 무리하게 운전한 탓에 두통까지 생겼기에 수업을 빠질까 말까 고민도 됐다. 오후에는 다른 일정도 있어서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오늘은 새로운 선생님을 만나는 날이기도 하고 지난주 토요일에도 자체 휴강으로 쉬어갔기 때문에 2주 연속 연달아 이틀을 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딩-했다. 재빠르게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오늘은 운 좋게도 횡단보도 신호등이 내 편을 들어주었고, 놓칠 뻔한 버스를 바로 탈 수 있었다. 지독하게 힘들 땐 운이 나를 살린다. 운이 좋은 사람은 늘 더 좋은 운을 만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니는데, 운이 나쁜 사람은 가끔 주어지는 소박한 운에 그저 감사해한다.


1분 늦었다. 잠수복을 입은 젊은 선생님이 체조를 선보이고 있었다. 수영장을 빙 둘러 반은 걷고 반은 뛰어서 인적이 드문 앞자리, 수심 낮은 곳에 들어갔다. 선생님들마다 체조 루틴이 다른 것이 신기한데 그걸 또 매 수업마다 똑같이 반복하는 것도 신기하다. 나는 체조를 따라 하며 반쯤 멍을 때렸다. 시선이 정면으로 향하는 곳에 투명한 수영 마스크가 놓여있었다. 저걸 쓰고 수영하면 어떨까? 코로나 예방 효과가 있나? 누가 가져왔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잠수복을 입은 선생님은 체조가 끝나고 그 마스크를 집어 착용하셨다.


선생님은 모두에게 자유형 발차기 2번, 배영 발차기 2번을 하라며 평영 배우신 분은 평영 1번을 더 하라고 하셨다. 나는 자유형 발차기를 4번 해야겠군, 하며 마지막 순서를 기다렸다. 선생님이 갑자기 물속으로 들어오셨다. 선생님이 물속으로 들어오는 건 처음 보는 일이다. 자리가 좁아서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선생님은 도로를 통제하는 경찰관처럼 발차기 연습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킥판 잡는 위치를 바로잡아주었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나 역시 평소대로 음파 발차기를 연습하고자 킥판의 아랫부분을 팔꿈치 선에 맞추고 킥판이 동그래지는 지점 근처를 손으로 움켜쥔 채 출발했다. 내가 두 번쯤 음-파-를 했을 때 선생님은 내 킥판을 잡아 나를 멈춰 세웠고, 킥판 앞쪽을 잡으라고 손짓하셨다. 나는 그럼 호흡은 안 하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팔이 길지 않아서 킥판 앞쪽을 잡으면 정수리가 킥판에 닿기 때문에 이렇게는 호흡이 불가능했다. 선생님은 호흡은 굳이 안 해도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들고 발차기를 했다. 고백건대 정말 지루한 여정이었다.


이틀 연속 2시간 자전거 여행을 떠나왔더니 내 엉덩이와 허벅지는 피곤함에 절어 있었고, 아주 약간의 발차기에도 금세 두 다리가 뻐근해졌다. 음-파- 호흡을 하지 않는데도 다리가 이렇게 피곤할 수가 있나. 너무 힘들어서 쉬엄쉬엄 하고 싶었다. 체력은 한참 달리고, 발차기만 하려니 속도도 좀처럼 나아가질 않았다. 그래서 더 힘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두 바퀴째 킥판을 끌어주셨고, 이내 나의 두 발목을 잡고는 빠르고 규칙적인 속도로 교차해가며 움직여 주셨다. 선생님이 내 발을 놓자마자 나는 그 속도와 각도를 유지하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이 손으로 만들어준 속도의 1/3 정도로만 달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핸즈온만으로 이렇게 나아질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다음 바퀴에도 자유형 발차기를 하고 있자 선생님은 내게 왜 배영을 하지 않냐고 물으셨다. 아직 안 배웠어요! 그랬더니 고개를 끄덕이시며 천천히 하라고 하셨다. 그다음 바퀴째에는 무릎을 펴라며 오금 쪽을 만지셨고 다시 발차기 모양을 다듬어주셨다. 음-파- 호흡을 이렇게 오랫동안 연습 안 해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고 슬슬 지루해졌다.


네 바퀴를 돌고 돌아오니 선생님은 모두를 모아 다음 동작을 알려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내게는 어디까지 배웠냐고 물으셨고 나는 팔 돌리기까지 배웠다고 했다. 킥판 잡고요? 네-! 그래서 킥판 잡고 팔 돌리기를 시작했다. 음-파- 연습도 안 하고 팔 돌리기를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잘 됐다. 물을 밀어내는 느낌도 어느 때보다 명확했고 몸이 기울지도 않았다. 물을 들이마실 것 같은 순간도 적었다. 체력 문제로 평소보다 더 힘든 것만이 유일한 문제처럼 보였다.


한 바퀴만 돌고 와서는 선생님에게 사실은 거북이 등 차고 맨손으로도 해봤고 저기 저 동그란 거 잡고도 해봤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저 땅콩을 잡고 연습하자고 하시며 직접 가지러 가셨다. 아, 나 혼자 조랭이 떡이라고 부르던 부표의 이름이 땅콩이었구나. 이제야 알게 됐네.


이 선생님 수업에서는 선생님 지시대로 몇 바퀴를 돌고 나면 모두가 앞쪽에 서서 기다려야 했다. 어떤 할머니께서 나를 보며, 뭘 하래요? 물으셔서 나는 저만 땅콩 잡고 연습하라고 하셨어요. 대답했다. 땅콩을 받아 들자 선생님은 마지막 주자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더니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바퀴를 덜 돌았던 것이다.) 모두의 팔 돌리기 문제점을 지적하시며 시범을 보여주셨다. 여기 와서 선생님의 수중 시범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두 팔은 반드시 뒤통수 뒤쪽에 위치해야 하며 어깨와 머리는 꼭 붙어 있어야 한다. 고개를 더 들어야 할 때에도 정수리만큼은 팔뚝과 붙어 있어야 한다. 선생님은 팔과 머리가 떨어졌을 때의 자유형과 붙어있을 때의 자유형을 각각 2번씩 보여주셨다.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은 시범을 보이자 다들 멋쩍게 웃어 보였다. 팔이 머리와 잘 붙어있는 시범은 정말 프로 같았다! 이런 시범은 유튜브 영상으로만 봐야 했는데.. 신기했다.


동시에, 어떤 분야에서건 말로 하는 설명이 잘 풀리지 않을 땐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도 제대로 해야 지도 효과가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무용을 배울 때도 몇 번이나 느꼈던 것이기에. 무용 분야에서도 티칭 초보 분들은 꼼꼼하게 가르쳐주는 대신 설명하는 데 오랜 시간을 잡아먹고, 자연스레 진도 나가는 속도가 느려지고 연습량도 줄어든다. 뭐든 일장일단이다. 적어도 오늘은 몸살 나기 직전인 내 컨디션과 딱 맞는 수업이었다. 연습량은 거의 절반쯤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적절한 설명과 핸즈온이 있었기에 많이 배워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시범이 끝나고 이상하게도 내가 1번 타자가 되어 있었고 나는 나의 느린 속도가 걱정되었지만 땅콩을 잡고 슝 나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파- 호흡에 맞게 내 머리 각도를 주셨고 어깨와 팔, 골반까지 잡아주셨다. 그래서 어깨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이해는 못했지만, 몸은 알아들었는지도 모른다. 골반은 과도하게 흔들리지 않도록 제지시켜주신 듯했다, 이건 무용을 배울 때도 비슷하게 지적받았던 일이다. 두 바퀴째에는 발차기도 다시 잡아주신 것 같다.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사실 첫 바퀴를 돌고는 너무 힘들어서 두 분을 강제 새치기하게 해드렸고, 두 바퀴째를 돌고서는 할머니 동료 수강생 분께 칭찬을 들었다. 몸이 기울지도 않고 아주 예쁘게 잘 뻗는다고. 다른 걸 배우면 더 잘하겠다고 말이다. 뿌듯하고 기쁜 순간. 나 하기도 바빠서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잘 보지도 못하는데, 이틀 연속으로 다른 수강생 분들께 칭찬을 받다니!


수영까지 하고 나니 약간의 어지러움이 더해졌다. 씻고 나오는 데도 한 세월. 역시 토요일이라 헤어 드라이기 존은 더욱 한산했다. 드라이기 2개를 동시에 잡고 머리를 말리고 나왔다. 햇살은 따뜻했고 버스는 한참 뒤에 도착했다. 근처에 마련된 일광욕 존에 잠시 누워 5분만 눈을 감자고 생각했다.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아늑함과 편안함. 내 방 침대와는 비교가 안 되는 느낌. 이대로 잠들면 너무 좋을 것 같았다. 이번에 오는 버스를 놓치고 다음 버스를 탈까 고민했지만, 시간 절약을 위해 일어나기로 했다. 횡단보도로 가는 길에 보였던 어떤 순경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이제 보니 캠코더를 들고 있었다. 잠입 수사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내 갈 길을 갔다.


내 몸은 채소를 부르짖었다. 뭔가를 먹고 싶었지만, 빵도 싫고 밥도 싫고 면도 싫었다. 단백질도 싫었다. 건강한 샐러드 한 끼를 먹고 싶었다. 그래서 힘든 몸을 이끌고 채소 가게로 향했다. 싱싱한 채소를 사 봤자 만만한 건 늘 상추와 깻잎이다. 오랜만에 토마토도 샀다. 잘 익은 방울토마토. 내 몸에 수분이 부족한 건지 오이도 끌렸다. 근육의 피로도를 덜게 해 줄 바나나도. 두부도. 다시마도. 집 근처에 저렴한 채소 가게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잘 차려 먹고 나니 푹 쉴 수 있는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았다.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저 두 눈을 감고 피로감에 심취했다.


오후 일정은 생각보다 만족스럽지 않았다. 내 나쁜 컨디션이 가장 큰 요인이었던 것 같다. 오가는 버스에서 선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 너무 피곤해서 폰을 들여다볼 기운조차 없었다. 일요일 오후에서야 이틀 치 일기를 몰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피곤하다. 마감에 절어 며칠이고 밤을 새우던 지난날이 생각난다. 그때와 똑같다. 어떻게 하면 이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고통, 아니 시련, 아니 마음의 병일지도. 그리고 어떻게 언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관계를 멈추기로 하고 누군가는 삶을 멈추기로 한다. 그럼에도 나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장례식장에 다녀온 지 일주일, 누군가의 소리 없는 결별 선언을 받아들인 지 하루. 돌이킬 수 없는 그 어떤 시련과 고통에도 잠시 주저앉아있을 수는 있어도 영원히 포기할 수는 없다. 남들보다 조금 더 쉬어갈 수밖에 없는 게 나의 체질일까 본성일까. 이해받고 싶고 공감받고 싶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책을 읽고 좋은 것을 보자고 다짐해도 늘 다른 길로 샌다. 정말 인생이 사람의 노력에 달려 있는 걸까.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일련의 사건으로든 나는 늘 혼란에 빠지고 무기력에 빠진다. 그럴 때일수록 나는 물이 간절하다. 내일 아침 다시 물속으로 풍덩- 빠져들 일만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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