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일. 너무 빨리 찾아온 수태기와 번아웃

by 속삭이는 물결

어젯밤에 갑자기 엄청난 우울감이 찾아왔다. 수영이고 뭐고 다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었다. 우울감에 마구 먹어대니 속은 속대로 더부룩했고 기분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내일 수영은 그냥 빼먹을까, 그래도 내일 아침이 되면 기분이 달라질지도 몰라.


다행히 잠은 잘 왔다. 아주 빠르고 편안하게, 푹. 새벽 5시쯤 깼다. 세상이 하얗게 밝아 있었고, 생각보다 기분은 멀쩡했다. 이대로면 수영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 더 잠을 청한 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수영을 다녀왔다.


가는 길에 계속 생각했다. 이건 번아웃과 비슷한 양상이라고. 그동안 너무 열심히 수영에만 매달렸으니 지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지금 인생에서 수영 빼면 남는 게 없거든. 돌이켜보면 일할 때와 거짓 없이 똑같다. 열심히 온 진심을 다해 일할수록 번아웃은 빨리 찾아온다. 그리고 난 늘 그렇게 살아왔다. 물론 요령 피울 때도 있었지만.. 내 인생에 적당히란 없는가? 아주 미쳐서 열심히 하거나 아주 힘이 빠져서 극도로 게으르거나 둘 중에 하나다.


준비 체조가 끝나고 키 큰 사람, 남자 등등을 먼저 보내지 않고 앞쪽에 서니 마치 앞길이 태평양 같았다. 허벅지 뒤쪽은 쉽게 피로해졌고 어느 때보다 힘들었다. 속도도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그렇게 자유형 발차기 두 바퀴, 배영 발차기 두 바퀴를 연습했다. 자유형 발차기 때는 1/3쯤은 고개를 밖으로 빼서 했다. 속도는 뒤처질 수밖에 없지만 물속에 들어가질 않아서인지 덜 힘들다. 배영 발차기 때는 생각보다 속도가 나쁘지 않았다.


이제 자유형 팔 돌리기 연습이다. 오늘은 킥판 대신 땅콩 볼을 잡고 시작했다. 발차기가 엉망이 되었다. 두세 바퀴를 돌았는데 벌써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발차기 연습 때는 그래도 기본기를 연습한다 생각하고 견뎠는데, 팔 돌리기가 시작되니 너무 재미가 없어졌다. 파-할 때 몸을 완전히 측면으로 돌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지만 집중력도 현저히 떨어져서 잘 되지가 않았다. 지난하다.


잘한다는 칭찬도 들었는데 오늘은 별로 기쁘지도 않았다. 내가 벌써 땅콩 볼도 뗐다며 칭찬하시는 분도 계셨고, 이제 팔꺾기를 해보라고 용기를 주시는 분도 계셨다. 팔꺾기는 아직 배운 적이 없지만, 배울 의욕도 생기지가 않았다.


그리곤 바로 맨손 팔 돌리기를 해봤다. 손으로 무언갈 잡아야 하는 것보단 맨손으로 가는 게 훨씬 추진력이 좋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재미가 없었다. 선생님이 말한 사람들이 지치는 30분 이후가 되었고, 나는 내 맘대로 킥판 잡고 배영 팔 돌리기 연습도 했다. 앞뒤가 여유로워서 누군가를 방해하지 않을 수 있었다. 팔로 물을 밀어내면서 속도를 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율동을 하는 것 같았다. 한 바퀴 돌고 나니 또 지겨워졌다. 그래서 다시 맨손 자유형을 연습하기로 했다.


한 바퀴 반은 돌았나, 가는 길에 또 호흡을 멈춰버렸다. 이제는 헛웃음이 나와서 웃던 와중에 입에 물까지 들어가는 바람에 멈춰 섰다. 선생님이 보고 계셨다. 계속 “잘하시니까”라는 말을 섞으시며, 힘 배분을 잘해야 한다고 하셨다. 팔로 물을 가로지를 때 힘을 주고 팔이 되돌아올 때는 힘을 빼야 한다. 발차기도 마찬가지로 힘을 줬다 뺐다를 반복해야 한다. 25m를 왕복해서 왔다갈 수 있는 실력인데 힘을 너무 많이 주고 하면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다. 7:3 정도로 힘 분배를 잘해야 한다. 내가 이해한 건 팔 돌리기를 할 때 힘을 주고 빼야 하는 구간 정도밖에 없다. 발차기를 한쪽 발만 힘을 줘야 하는 거냐고 되물었지만 선생님의 답변을 이해하진 못했다. 그래도 한 차원 높은 피드백을 듣게 되어 조금 기뻤다. 자세한 건 유튜브를 보면서 깨달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쩜 이건 내가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강약 중강 약, 리듬감이 없는 이상한 삶.)


아, 몸에 힘을 너무 많이 줘서 몸이 휜다고도 하셨다.


나는 그럼 물이 입안으로 들어올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선수들은 물을 먹거나 뱉는다고 한다. (띠용~) 잘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다. 입 안에 물이 반쯤 차도 열려 있는 다른 반으로 공기를 충분히 들이마실 수 있기 때문에 다시 음-하며 들어갈 때 다 뱉어낸다고 한다. 숨을 들이마실 때 흐에에에에에에 숨이 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야 들이마신 거라고 생각하는 내겐 말도 안 되는 말이다. 그렇게 들이마신다면 물은 목 뒤로 넘어가고야 말 것이다. 양치를 하듯이 물을 머금고 연습해 봐야 하나?


우스웠다. 아까는 수영이 너무 하기 싫어서 남들을 몇이나 먼저 보냈는데 수업 끝나고는 조금 더 해보고 싶어서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곤 또 반 바퀴를 도는 건 부끄러워서 반 바퀴는 수영보다 힘든 걷기로 갔다. 다른 분들은 더 열심히 수영을 했다. 아직 한 달이 안 되신 분들이다. 10년은 다녔을 것 같은 분들은 체조할 때 빠져나가서 샤워장 자리를 찜하신다.


아무튼 새로운 연구과제가 주어졌으니 당분간은 여기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수태기를 맞이해서 어떡하나 그만둘 수도 없고, 고민이었는데.. 딱 한 달만 더 열심히 해보자? 내일도 빠지지 말자?

작가의 이전글31일. 권태기는 정체기를 의미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