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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용 Jul 26. 2020

식전주 포트 와인에 취해서

시어머니도 못 알아볼 뻔 한 날.

2019년 7월 23일


프랑스 시댁을 방문할 때마다 힘든 점 중 한 가지는 저녁마다 배가 고프다는 점이다. 시댁에서는 밤 9시가 다 되어서야 저녁 식사를 하는데 나는 오후 5시부터 이미 배가 고프다. 

 

식사 시간은 멀었고 배는 고프고... 뭐 먹을 게 없나 부엌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시어머니께서 구워 놓으신 브리오슈가 보이길래 한 조각 잘라서 오물거리며 거실로 돌아왔다. 자서방이 그걸 보고는 내가 뭔가 입이 심심한가 보다 싶었던지 "화이트 와인 갖다 줄까?"하고 묻길래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끄덕끄덕했다. 역시 내 남편이다.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말씀하셨다. 


"폭트 와인! 너 그거 마셔볼래? 너 분명 그거 좋아할 거다. 내가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뭔지는 몰라도 알았다고 말씀드렸고 시어머니는 지하실로 급히 내려가셨다. 와인은 와인인데 폭트 와인이 뭐지? 


자서방이 포르투갈 와인이라고 정정해 주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아.. 포르트가 프랑스 발음으로 폭트가 되었나 보다.

금세 와인병을 하나 들고 올라오신 시어머니께서 부엌에서 병을 오픈하신 후 와인잔에 한잔 가득 부어서 거실로 돌아오시며 말씀하셨다. 


"내 친구들은 이걸 올드 레이디 와인이라고도 하지. 나이 든 여자들이 좋아하는 맛이거든ㅎㅎ 너도 분명 좋아할 거다." 


그 말을 듣고 왠지 나를 놀리고 싶은 욕구가 얼굴에 가득한 자서방에게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남자는 안 줘." 


정작 시어머니께서는 맥주를 드셨다. 저걸 마시면 잠이 온다면서 말이다. 


프레첼도 한 봉지 뜯어서 접시에 예쁘게 담아 주셨다. 


"근데 웬 포트 와인이 있으세요? 혹시 이거 파티마가 준거예요?"


파티마는 포르투갈 출신의 시어머니 예전 직장 동료이다. 

시어머니께서 갑자기 한숨과 함께 허공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다.


"응, 실은.. 그녀의 오빠가 두 달 전에 죽었거든... 안토니오, 와인 고맙다..." 


그녀의 오빠 이름이 안토니오였나 보다. 나도 덩달아 허공에 대고 말했다. 


"메르씨 안토니오..."


"맛이 없으면 그거 그냥 버리고 화이트 와인 마셔도 되니까 억지로 다 마실 필요는 없단다."


시어머니의 우려와는 다르게 내 입에 아주 잘 맞았다. 사실 사연을 듣고 보니 더더욱 한입만 먹고 버릴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한잔을 금세 다 비우고 브레첼도 욤뇸뇸 몇 개 집어 먹고는 부엌에 가서 두 번째 잔을 가득 따라왔다.


두 번째 잔도 후딱 비우고 나니 갑자기 취기가 확 올라왔다. 


"아 졸려..." 하면서 갑자기 소파에 널브러졌더니 자서방이 이상하다 싶었던지 부엌에 가서 포트 와인병을 들고 오며 말했다. 


"오, 이거 도수가 19.5도나 되네. 와이프가 뻗을 만 해..." 


왠지... 그랬구나... 달달해서 몰랐네... 빈속에 두 잔을 연거푸 쭉쭉 마셨더니 취기가 점점 더 올라온다..


"괜찮아, 취해도 돼. 한잔 더 마실래?ㅎㅎ" 


놀리는듯한 자서방의 한마디에 시어머니께서도 웃으며 말씀하셨다.   


"올드 레이디들이 그래서 좋아하는 거란다. 밤에 이걸 마시면 잠이 잘 오거든."


아... 헤롱헤롱... 두 사람이 나를 보며 웃든 말든 나는 기분이 붕 뜬 채로 그냥 만사가 다 귀찮은 기분이었다.


그때 시어머니께서 티브이에 소방관들이 나오는 걸 보시고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오 소방관이다! 넌 소방관이랑 결혼하거라! 그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거든."


"저 결혼했는데요?"


"아, 안됐네."

이쯤 되면 누가 취한 건지 모르겠다. 시어머니께서는 티브이에 뭔가가 나올 때마다 옆에서 널브러져 누워있는 나에게 저거 좀 보라고 소리치셨지만 나는 눈도 잘 떠지지가 않았다. 


잠시 후 시동생으로부터 화상 전화가 걸려와서 시어머니께서 반갑게 받으시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이미 취해서 머리로는 생각이 돌아가는데 행동이나 표정으로는 잘 표현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사정을 모르시는 시어머니께서는 폰 화면에 나를 비추셨고 시동생은 반갑게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긴 한데... 사실 너무 귀찮... 

나는 여전히 소파에 모로 누워서 대답은 안 하고 모웬이랑 비슷한 표정으로 시어머니의 핸드폰만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얼른 자서방에게로 화면을 바꾸셨다가 마지막에 한번 더 나에게 비춰주시며 기회를 주셨건만 나는 여전히 모웬이 빙의된 표정만 나오고 있었다...

내가 왜 이러지....


시어머니께서 쟤 취해서 저런다고 설명 해 주실 줄 알았는데 그 말씀을 안 해 주셨다. 아무도... 

나 정말 버릇없고 이상한 외국인이 된 것 같았다.


잠시 후 시어머니께서 저녁 준비하시는 소리가 들려와서 도와드려야 된다고 몸을 일으켰는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서 그냥 다시 누워버렸다.


"나 너무 취한 거 같아..."


그걸 보고 웃던 자서방은 다들 알고 있으니 괜찮다고 했다.


그러다 시어머니께서 거실 옆에 있는 유리병들 (잼이나 토마토소스를 만들어서 보관하는 병)을 수거하시는 소리가 나서 그거라도 도와 드리려고 벌떡 일어나서 갔다. 시어머니께서는 웃으시며 남은 병들은 다음번에 지하실에 내려갈 때 가져가면 된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다. 시어머니께서 유리병들을 한 아름 안고 지하실 계단으로 조심조심 내려가시는 걸 보고는 내가 미쳤는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문 잠가버려야지!! 우헤헤" 하고는 지하실 문을 세게 닫아 버린 것이다. 


곧 내가 정말 미쳤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농담이에요" 라며 문을 얼른 다시 열었더니 시어머니께서는 계단 중간쯤에서 유리병들을 끌어안은 모습 그대로 굳어 계시다가 다행히 나를 향해 웃어주시고는 다시 걸음을 천천히 떼셨다.


후회와 부끄러움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로 거실로 돌아와서 자서방에게 내가 저지른 만행을 고백했다. 자서방은 깔깔 웃으며 말했다.


"넌 그냥 여기 누워서 자고 있어. 밥 먹을 때 깨워줄게."


저녁은 또 먹겠다고 시간 맞춰서 일어났다. 그나마 한숨 자고 났더니 정신이 좀 돌아왔다는 게 다행이었다. 


밥 먹으면서 습관적으로 레드와인이 담긴 자서방의 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더니 온 식구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내가 잔을 내려놓자마자 자서방이 잔을 멀리 치워버렸다. 


"넌 오늘 충분히 마셨어. 그리고 포트와인은 이제부터 금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응 정말 금지... 나도 알고 있어...


그날 밤 잠자리에 들면서 자서방이 말했다.


"아~ 난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지금 다 가졌어. 술 취한 와이프까지."


나 오늘 정말 아슬아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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