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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용 Jun 19. 2023

며느리가 아니라 손녀딸이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2021년 1월 20일. 


아침에 일어났더니 눈이 더 많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뒷집에는 키 큰 눈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노란 모자를 쓰고서. 


점심을 먹고 있을대 시어머니께서 메시지를 보내오셨다. 

[너희를 위한 마쉬 샐러드란다.]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저희도 샐러드가 많거든요.]


하지만 시어머니께서는 포기(?) 하지 않으셨다.

[이건 농장에서 사 온 건데?] 

[그리고 나는 널 위해 참기름도 사다 놓았단다.}

[또 네가 오면 핫초코도 만들어 줄 수 있어.] 

아 이쯤 되면 가야지...      



어머님께서는 많은 참기름에서 농약성분이 검출되었다는 기사를 보셨다며 나를 위해 유기농샵에 가셔서 참기름을 사 오신 것이었다. 


[저 지금 갈게요. 모웬한테도 제가 간다고 좀 전해주세요. 같이 눈사람 만들자고요.] 

시어머니께서는 알았다고 하시며 모웬이 혼자 눈 위에서 노는 비디오도 보내주셨다. 





시댁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정원으로 직행했다. 시아버지께서는 계단이 미끄러우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내가 며느리가 아니라 방학 때 할머니네 놀러 온 손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눈이 안 뭉쳐진다. 장갑에만 달라붙기만 하고... 엉엉... 


여러 번 시도하다가 결국 안 돼서 그냥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나오시더니 눈사람 눈에 붙이라며 커피콩을 두 개 주고 가시는 게 아닌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서 다시 노력했다. 요용은 포기하지 않아요! 





시어머니께서 사진도 찍어주시고 지켜보고 계셔서 더더욱 포기할 수가 없었다.

"핫초코 만들어 놓을까?"

"아니요. 그냥 녹차가 좋을 것 같아요. 집에서 초콜릿케이크를 먹고 왔거든요." 



결국 장갑을 벗고 맨손투혼으로 작은 오리를 탄생시켰다. 시어머니께서 주신 커피콩으로 눈자리에 콕콕 박아주었다. 



자서방에게 오리 사진을 보내줬더니 완벽하다고 했다. 




잠깐 밖에 있었을 뿐인데 신발이며 장갑이며 온통 눈투성이가 되었다. 집에서 챙겨 온 자서방의 장갑은 벽난로 위 촛대에 꽂아두고 말렸다. 혹시 내가 갈 때 까먹고 안 가져가면 말씀 좀 해달라고 시부모님께 몇 번이나 강조했다. 


"아참, 장갑 까먹은 얘기 하니까 떠올랐어요. 저랑 자서방이랑 눈사람 만든다고 공원에 갔었잖아요......" 

눈사람을 만들겠다고 찾아가 놓고는 막상 도착해서는 내가 장갑을 깜빡했고, 자서방은 또 본인이 먼저 거길 가자고 제안했으면서도 도착하자마자 춥다고 집에 가자고 했다고 말씀드렸더니 시아버지께서 커피를 드시다 말고 큰소리로 웃으셨다. 소리 내서 잘 안 웃으시는데 크게 웃으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벽난로 앞에 앉아서 시어머니께서 준비해 주신 뜨거운 녹차 한잔을 마셨더니 몸이 금세 녹았다. 대신에 볼이 새빨개졌는데 시어머니께서는 자꾸 웃으시며 내 얼굴을 휴대폰으로 찍으셨다. 안 돼요... 앙대...

"예쁘기만 하다. 마 벨피으 마 졸리 피으!"  

프랑스어로 며느리는 벨피으 (Belle-fille)인데, 벨 (Belle): 아름다운, 피으(Fille): 딸, 이 두 단어가 합쳐진 것이다. 그걸 몰랐던 나는 한동안 시어머니께서 나를 예쁜 딸이라고 부르시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벨피으라고도 부르시고 마 졸리 (jolie: 역시 예쁘다는 뜻이다) 피으 즉, 내 예쁜 딸이라고도 부르신 것이다. 

비록 내 얼굴이 에스키모가 되었고 어머님께서는 또 그 사진을 친구분들께 뿌리시겠지만 그래도 예쁘다고 해주시니 뭐.... 맘껏 찍으셔요...      


모웬! 너 어디 숨어있다가 이제야 나온 거냐! 나 혼자 눈사람, 아니 눈오리 만들었잖아. 

뒤늦게 나타난 모웬이 얌전하게 내 앞에 앉아서 눈인사를 건넸다. 




모웬! 내가 만든 오리 봤어? 나가서 구경해 봐!

모웬은 나가서 잠시 오리를 바라보더니 올라가지는 않았다. 눈이 너무 높이 쌓여서 점프할 엄두가 안 나는 듯했다. 


녹차를 다 마신 후 집에 가겠다고 일어났더니 시어머니께서 이것저것 준비하신 것들을 봉지에 담아주셨다. 



"바닥에 호일에 쌓인 건 뭐예요?"

"내가 만들 갈레트란다. 부르주식이지." 

"근데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시어머니께서는 내가 꺼낼까 봐 안 많다고 하시며 잽싸게 봉지를 닫으셨다. 


집에 와서 보니 커다란 갈레트가 3조각이나 들어있었는데 다행히 자서방이 갈레트를 보고 너무나 좋아했다. 시어머니처럼 부르즈가 고향인 자서방은 시어머니표 수제 갈레트는 최고 중의 최고라고 했다. 



오늘도 나는 시댁에 가서 이쁨도 많이 받고 먹을 것도 많이 얻어왔다. 나는 고작 시댁에다 작은 눈오리를 남겨드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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