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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용 Aug 26. 2020

해 좋은 날 빨래 널기

햇볕 냄새 가득 머금고 짱짱하게 마른 빨랫감들

2020년 6월 10일


오전부터 해가 유난히도 화창했다.


자서방은 출근하고 나는 테라스에서 시어머니와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해가 정말 좋구나. 오늘 뭐 빨래할 거 없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던 시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이 떠오르셨는지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같이 할 일이 있다고 하셨다.

내가 커피 마시는 동안 시어머니께서는 장롱에 쌓아두셨던 주방용 수건들을 산더미 같이 가져다 놓으셨고, 지하실로 나를 데리고 가시더니 세탁기 사용법을 알려주겠다고 하셨다.

  

"이 세탁기 너희 이사 갈 때 줄 거야. 그런데 다 프랑스어로 돼 있으니 사용법을 알려줘야 할 것 같더구나. 지하실에 두긴 했지만 빨랫감이 많을 때는 지금도 가끔 사용하고 있단다. 오늘은 이 세탁기로 주방 수건들을 빨자꾸나. 예쁜 수건들을 네가 골라갈 수 있도록 말이다."

 

오호! 세탁기 득템이닷!


"난 세제를 많이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단다."라고 하시며 실제로는 세제를 마구 쏟아붓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거... 조금 넣으신 거예요?"


"아니. 왕창 넣었어, 호호~"


음... 수건을 빨아서 나를 주려고 하시는 거니까 더 깨끗하게 빨고 싶으신 거.. 겠지..?

세탁된 빨래들을 널기 위해 정원으로 나가면 어김없이 이스탄불이 달려온다. 그리고 옆에 앉아서 끝까지 구경한다. 모웬은 빨래를 너는데는 관심이 없고 오히려 빨래를 갤 때 더 좋아한다.

상쾌한 날씨에 상쾌한 세제 냄새가 퍼졌다.

해가 쨍쨍해서 금방 마르겠지?

주방 수건들이 정말 많았다.

 

"오 해가 짱짱한 날 깨끗한 수건들을 보니 내 기분이 너무 좋구나!"  

불과 두 시간 만에 몽땅 다 말랐고 모두 테라스로 걷어와서 시어머니와 차곡차곡 개기 시작했다.  


빨래세제 냄새에 햇볕 냄새가 더해져서 더더욱 상쾌한 느낌이었다.

수건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여행, 소중한 사람, 그리고 기억들...


"이건 스웨덴에서 사 온 거... 이건 아니가 선물 준거... 이건 노르웨이에서 사 온 거... 이건 네가 달라고 해도 안 줄 거야. 선물 받은 거라서... 이것도 못줘... 이건 내 사촌이 준거야... 그녀는 며칠 전에 죽었어... 근데 장래식은 7월에 할 거야..."  


앗... 의식의 흐름대로 독백을 하고 계셨다.


접시도 닦고 손도 닦고 하려고 열개 정도 넉넉히 골랐는데 시어머니는 계속 더 얹어주셨다.


"저 이거면 정말 충분할 것 같아요."

자꾸자꾸 얹어주시는 바람에 너무나 많은 주방 수건들이 생겼다.


그러고 나서 나는 수건들을 가지고 위층에 올라가서 다림질을 시작했다.


룰루랄라 재미있는 시어머니의 다리미 기계~~

어마어마한 양의 저 수건들이 모두 내 거다! 너무 많은데....


하지만 저것 두배 정도가 시어머니의 장롱 속에 더 쌓여있다. 그래서 앞으로 더 필요하면 절대 사지 말고 와서 가져가라고 하셨다. 저것도 충분한데요...


다리미 기계 옆에 다림질이 필요한 다른 옷감들도 있길래 나는 그것들까지 모두 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고를 쳤다.

무늬는 위로 향하게 해서 다리라고 하셨는데 그걸 깜빡하는 바람에 앞치마 하나를 망쳐버렸다.

아... 이거 선물 받으신 거면 어쩌지...


소중하게 안고 내려가서 시어머니께 긴장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더니 시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호호호~ 그거 너 주려고 꺼내놓은 거란다. 뭐 무늬 좀 망가지면 어떠니, 사용하는데 지장 없으면 됐지, 안 그러니? 혹시 그게 마음에 안 들면 다른 앞치마로 골라가도 된단다."


휴우..


시어머니께서 오늘 주신 물건들을 정리해서 지하실로 다 옮겨놨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삿짐이 지하실에 매일매일 쌓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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