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패트릭데이 그리고 투머치 토커

by 혜연

3월 중순의 어느 날. 에리카가 주말에 함께 바에 가자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번 주말이 성 패트릭이거든! 작년에 너 못 왔었잖아. 올해는 꼭 같이 가야 해! 남자 친구도 같이와!]

나는 성 패트릭이 무슨 날인지도 몰랐는데 검색해 보니까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한 수호성인 패트릭을 기념하는 날이라고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냥 초록색 옷을 입고 술 마시는 날...?

외향형인 버거씨는 재미있겠다며 신이 났다. 성 패트릭보다도 내 친구들을 처음으로 소개받는 자리라 들뜬 것 같았다. 정말 제대로 외향형이다.

우리 커플은 나름 초록색 옷을 입고 (서랍에 고이 모셔둔 큼직한 플라스틱 초록 귀고리가 빛을 발하는 날이 왔다!) 약속장소인 아이리시 펍에 손을 잡고 들어갔더니 미리 와 있던 친구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야! 너 얼굴에서 빛이 나! 너무 좋아 보여!"

내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 얼굴이 좋아졌다고 말하곤 한다. 끝이 없을 것만 같던 캄캄한 터널을 드디어 벗어난 게 맞나 보다.


에리카와 알마, 마이크 등등 내 친구들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눈 버거씨는 술을 가지러 바에 가려고 다시 일어났다.

"넌 앉아있어, 내가 갖다 줄게. 붉은 맥주 맞지?"

마이크가 에리카를 위해 술을 갖다 주는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 부러웠는데 살다 보니 나에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같이 프랑스어를 공부했던 반 친구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계속해서 도착했다. 특히 이란인 친구들이 제일 많았다.

"이란인들! 너네는 꼭 그렇게 몰려다니더라."

"맞아! 담배 피울 때도 몰려 나가고 화장실도 같이 가고."

"심지어 수업에 지각할 때도 같이 들어오잖아."

우리가 놀렸더니 이란애들도 따라 웃으면서 그 말이 맞단다.

잠시 후 버거씨가 맥주를 들고 돌아왔을 때 우리 테이블은 이미 북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펍에서 초록색 스카프를 나눠주었고 우리는 머리나 목에다 둘렀다. 오랜만에 너무 즐거운 밤이었다.

알마나 에리카는 자주 만났지만 오랜만에 만난 다른 친구들은 나에게 계속해서 안부를 물어왔다. 그래 내가 그동안 뜸하긴 했지. 길고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왔으니까...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별일 없었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일 많았지! 나 별거해! 이혼하기로 했어!"

내 대답에 당황한 친구들의 눈동자들이 갈 곳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옆에 해맑게 앉아있는 버거씨의 눈치를 일제히 살피며 대답할 말을 못 찾고들 있었다. 친구들은 버거씨가 내 남편인 줄로 알고 인사를 나누었던 것이다.

"아, 이 사람? 남편 아니야."

버거씨를 포함해서 알마, 에리카와 나는 더 당황해하는 그 친구들의 반응에 미친 듯이 웃었다. 그 친구들은 따라 웃지도 못한 채 표정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괜찮아. 웃어도 돼. 이젠 다 지난 일이니까.

버거씨는 맞은편에 누가 앉아있건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문제는 말이 너어무 많아서 상대가 안쓰러워 보일지경이었다는 점.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와 내 친구들은 킥킥거리며 웃어댔다.

"내가 말했지? 말 진짜 많다고... 쟤 어쩌냐..."

"저 여자애는 지금 버거씨가 무슨 말하는지 반도 못 알아듣고 있어. 쟤 프랑스어 초급반이거든."

"쟤는 오늘 예쁘게 차려입고 파티에 나오면서 이런 상황을 기대하진 않았을 텐데..."

우리는 그녀를 딱하게 여기면서도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근데 버거씨 진짜 좋은 사람 같아. 막상 만나보니까 알겠어. 책도 많이 읽나 봐. 내 분야가 미생물학이라고 했더니 카자흐스탄 치즈 얘기를 하면서 박테리아 얘기를 하더라? 일반사람들은 잘 모르는 전문 용어들을 먼저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

오, 우리 오빠 좀 자랑스럽네?

알마는 자세를 고쳐 잡고 진지하게 말했다.

"네가 행복해 보여서 나는 정말 기뻐. 너는 이제 무조건 너를 넘버원으로 대해주는 남자를 만나야 해."

"스테판은 딸이 둘이 있는데도 네가 넘버원이래?"

"당연하지! 스테판에게 나는 무조건 최우선 순위야. 난 그걸 항상 느끼며 살아. 어차피 딸들은 다 성인이고 독립했으니 아빠한테 의지하면 안 된다고 항상 강조하지. 버거씨도 큰 아들은 이미 성인이라며. 둘째는 15살이니까 머지않아 성인이 될 거고..."

"잠깐만, 벌써 버거씨에 대해 모르는 게 없네? 언제 그렇게나 길게 대화한 거야?"

"응, 아까 바에서 같이 술 주문하는 그 잠깐동안 계속 계속 말하더라."

아... 오라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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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같이 어울려 술도 마시고 춤도 추고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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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거씨는 내 친구들에게 다음에 자기네 집에 놀러 오라고 초대를 했다. 테라스에서 바비큐 파티도 하고 룩셈부르크도 구경시켜 주겠다면서.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네.



**덧붙임

며칠 후 다시 만난 알마가 진지하게 말했다.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 봤는데..."

대체 무슨 생각을...?

"남자가 말이 많은 건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인 것 같아."

왜 그런 생각을 곰곰이 하는 건데....

"나이 들어 외출할 기운도 없을 때 한 집에서 과묵한 남자랑 단둘이 사는 게 좋을까 말 많은 남자랑 사는 게 좋을까? 난 후자가 낫다고 봐. 내 남편이 말이 좀만 더 많았어도 내 프랑스어가 훨씬 빨리 늘었을 거야!"

너무 앞서가는 내 친구.

"아무튼 버거씨는 좋은 사람 같더라는 거지."

그래 그건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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