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영화 ‘헤어질 결심’으로 살펴보는 말러 음악의 매력
음악으로 영화보기 #10
글 조세핀 (앙상블리안 칼럼니스트)
박찬욱 감독은 “사랑하는 건 결심이 필요하지 않지만, 헤어지는 것엔 결심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빌려와 보겠다.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음악을 사랑하는 데에는 결심이 필요하지 않다. 이는 말러의 교향곡과 예술 가곡들에 매료된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생겨난 ‘말러리안’이라는 용어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글에서 다룰 작품은 말러의 교향곡 5번(Symphony No.5 in c# minor)이다. 그 중 4악장인 아다지에토 악장 하나만으로도 사실은 쓰고 싶은 내용이 너무도 많다. 이 곡은 영화 ‘헤어질 결심’(Decision To Leave, 2021)뿐 아니라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Death in Venice, 1971)에서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애절한 찬가로 완벽하게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욕심을 누르고 이 글에서는 영화 ‘헤어질 결심’과 말러의 음악에 대해서만 써 보겠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말러의 교향곡 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 악장은 총 두 번 쓰였다. 첫 번째는 1부의 마지막에서 해준이 서래에게 자신의 붕괴를 고백하는 장면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단어, ‘붕괴’와 ‘사랑’이 박찬욱의 언어에선 이음동의(異音同義)가 된다. 이 장면엔 영화의 결말과 핵심적으로 연결되는 대사들이 길게 쏟아지는데, 덕분에 말러의 아다지에토 악장 역시 꽤 오래 삽입된다. 사실 말러의 교향곡 5번의 작곡 배경을 알고 있는 관객이라면, 건조하고 공격적인 대사들의 행간에 숨겨진 구구절절한 사랑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이 교향곡이 완성되던 1902년, 말러는 알마 신들러(Alma Schindler, 1879-1965)와 결혼을 했으며 특히 아다지에토 악장에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깊게 담아냈기 때문이다.
사실 이 교향곡의 전체 악장 구성과 흐름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나아가 이 영화의 끝을 짐작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말러가 이 작품의 작곡에 착수하던 1901년, 그는 심각한 장출혈을 겪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 해 작품을 완성하고 알마와 결혼을 하게 된다. 두 해를 지나며 말러는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는 장송행진곡의 1악장으로 시작해 낭만이 흘러넘치는 4악장을 거쳐 유난히 밝고 경쾌한 5악장으로 마무리되는 이 교향곡의 극단적인 대비성에서 드러나고 있다. 말러리안들이 말러의 음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세련됨과 순진성을, 분노와 평화를, 또는 승리와 추락을 교차하는 뻔뻔할 만큼 대조적인 음악들이 악장 간 흐름 속에서 신비롭게 조화를 찾아 서사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일까? 5번 교향곡에서도 아다지에토 악장 바로 앞에 죽음의 춤곡인 스케르초 3악장이 위치한다. 말러는 이 3악장을 두고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서도 죽음 속에 존재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즉 우리의 삶이 겉으로는 행복한 삶을 누리는 듯해도, 늘 집요하고 위협적인 시간이 우리를 추적한다고 본 것이다. 죽음이 추격하는 3악장의 뒤를 이어서 낭만과 사랑의 4악장이 이어진다는 것, 이 지점에서 필자는 영화 ‘헤어질 결심’ 속 서래가 스스로를 미결사건으로 가두며 영원히 잊히지 못할 사랑으로 남고자 한 그 마음을 투영해 본다. 이 아다지에토 악장이 흐를 때마다 해준과 서래는 서로에게 사랑을 에둘러 고백하거나 확인받지만, 직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헤어짐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두 번째로 아다지에토 악장이 등장하는 시점은 2부에서 택시 안의 대화 장면이다. 이 때 역시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정확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 잠을 배터리처럼 꺼내어 당신에게 주고 싶다.”는 서래의 대사가 있다. 그리고 해준은 이에 잠으로 대답한다. 서래와 잠깐 호흡을 일치시키는 짧은 찰나에 깊게 잠이 들어버려 현실감을 잃어버리는 해준의 육체와 정신은, 바로 사랑의 본질 그 자체이다. 해준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아내 곁에선 정작 잠에 들지 못한다. 해준과 서래의 호흡이 공기를 통해 교감하는 순간은 그 어떤 적나라한 접촉보다도 에로틱하게 느껴진다. 해준의 정신은 서래의 도움으로 무의식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이는 육체적 유희의 절정을 행위 없이 암시하면서도 두 사람의 영혼 또한 어떤 링크로 동기화되듯 일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다지에토 악장은 이 장면 뒤에 은은하게 흐르며 이것이 바로 ‘박찬욱 식의 사랑’이라고 계속하여 외치고 있다.
영화 전반적으론 현악기의 짧은 모티브와 음형이 반복되며 서늘함과 긴장감이 자주 조성된다. 사랑을 의심하거나, 떠 보거나, 의문하는 장면에서는 아다지에토 악장이 쓰이지 않는다. 말러의 음악은 영화에서 클라이맥스가 어디인지 정확히 짚어주고 있는 것이다. 해준과 서래가 사랑을 꺼내어놓는 시점, 서로에겐 비록 수수께끼처럼 남더라도 스크린 밖 관객은 어렴풋이 알아채는 그 때, 비로소 말러가 흐른다.
빈의 거리를 산책하며 시끄러운 일상의 소리를 듣던 말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다성 음악이야. …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것이 이상하게 나를 감동시켰어. 이런 소란이든, 수천 마리의 새가 노래하는 것이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소리이든,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이든, 불이 타오르는 소리이든 똑같아. 그런 식으로, 아주 판이한 방향들로부터, 테마가 들어와야 해. 또 서로서로 리듬에서든 멜로디 성격에서든 무척 달라야 해. … 유일한 차이는 예술가는 그것들에게 질서를 주고 통합시켜서 조화롭고 서로 일치하는 전체를 만든다는 것이지.”
말러는 아주 판이하고 상반된 아이디어들을 대비시키는 것을 선호했음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에게 영감이 되었던 수많은 테마들은 하나의 전체로서의 다성 음악으로 질서 있게 조직되었다. 철학자 아도르노(T. Adorno, 1903-1969)는 말러의 5번 교향곡의 4악장을 두고 ‘이전 악장들의 무리한 반항을 정화하는 악장’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해준과 서래는 서로에게 비극으로 남기 전,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반항하고 있었다. 산과 바다, 죽음과 사랑, 안개와 인공눈물 등 영화에서 드러나는 여러 대조들은 오히려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꼿꼿하게 남은 교집합인지 반증해준다. 영화에서 쓰인 아다지에토 한 악장에 한정하지 않고서도, 여러 의미에서 말러의 교향곡 5번과 영화 ‘헤어질 결심’은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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