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영화 ‘피아니스트’로 살펴보는 전쟁 속 예술가
음악으로 영화보기 #12
글 조세핀 (앙상블리안 칼럼니스트)
인간이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식량이 부족하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자유를 박탈당하여 입고 먹고 자는 모든 행위들을 어떤 상위 권력자에 의해 통제당할 수도 있다. 또는 문명사회에서 교육받은 것들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모두 빼앗길 수도 있다. 신체적인 고통 뿐 아니라 인간적 수치심과 모멸감을 가득 안으면서도 생명의 유지를 위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화 <피아니스트>(The Pianist, 2002)의 주인공 블라덱의 삶은 너무도 고통스럽다.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속에서 인류는 모두 다 함께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 극단적으로 잔인하고 참혹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이 영화는 피아니스트, 즉 예술가인 블라덱이 전쟁 중에 어떤 방식으로 생존을 향해 버티는지 그 과정을 보여준다.
블라덱은 영화의 시작에도, 끝에도 쇼팽(F. Chopin, 1810-1849)의 c# minor 녹턴을 연주한다. 연주 장소도 폴란드의 한 라디오 방송국으로 같다. 이러한 수미상관의 구조는 전쟁 동안 블라덱에게 일어났던 모든 고난의 시간이 무사히 과거의 일로 지나갔으며 그가 안전한 일상으로 완전하게 복귀했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은 대신 너무도 많은 것을 잃었다. 부모님과 세 명의 형제자매는 전부 학살당했다. 당시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아우슈비츠 등의 포로수용소에서 학살되었고, 이는 유럽 내 유대인 중 3분의 2에 이르는 수였다.
한 개인에게 시선을 좁혀보면 참상은 더욱 선명해진다. 블라덱의 정체성은 피아노를 연주하는 예술가이다. 그런 그에게 처음으로 일어난 비극은 유대인의 현금 소유를 제한하는 새로운 법 때문에 거실에 놓여 있던 벡스타인(Bechstein) 그랜드 피아노를 헐값에 팔아야 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게토(Ghetto,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만든 유대인 거주 지역)의 카페 하우스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도록 배치되는데, 이는 음악인으로서의 명예를 보존하기보다는 나치의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이자 선전 가치로 이용당한 것에 불과했다. 연주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카페 바로 밖 길거리에선 무차별적인 학살이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우슈비츠에서 나치군은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줄 세워 밀어 넣는 순간에도 유대인 음악가들에게 곁에 서서 슈만(R. Schumann, 1810-1856)의 트로이메라이(Träumerei)를 연주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나치는 살상을 예술로 승화하려 했다. 그 순간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더라도 그것이 예술가와 청중 어느 쪽에게든 유의미한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 오히려 예술가에겐 자신이 동포를 배신하고 현실을 잔인하게 기만하고 있다는 죄책감으로 쌓였을 가능성이 높다.
블라덱은 유대인과 폴란드인, 독일인 모두의 도움을 조금씩 받아 가까스로 생존해간다. 도움을 준 사람들은 인종을 넘어서는 불변하는 예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블라덱에게 “(너는) 예술가니까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거야.”라며 그를 구조해준다. 전쟁 중에 예술가는 예술을 통해 사람들을 북돋워줄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블라덱 본인의 생명이 위태로울 때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는 포로수용소의 노동 착취에 적응하지 못하고 쓰러지는 등 신체적으로 유약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에 이끌려 거듭된 행운 덕분이었다. 작은 아파트에 몰래 가둬 숨겨진 것도 대학살 속에서는 그 어느 유대인보다 부유한 자유가 되었다. 걸레 빤 물과 익히지 않은 보리쌀. 피클 국물을 먹어가며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홀로코스트 속 유대인 중에서는 엄청난 특권이었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에 다시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각각의 삶은 어떻게 변화할까? 누군가는 생을 유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같은 유대인 중에서도 나치의 편에 서서 악랄한 간부 역할을 맡은 카포(Kapo)가 된다면 생존 가능성이 비교적 높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성의 파괴에 맞서 자유와 해방을 위해 연대하고 목숨을 바친 사람들도 존재한다. 영화에서 바르샤바 게토 봉기를 계획하고 실천한 보구츠키 부부, 마요렉, 마렉 등이 그러하다. 그 사이 어딘가에, 수많은 극단적 상황 속에서 생존력도 현실 감각도 부족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한없이 약한 예술가인 블라덱이 있다. 블라덱은 힘 있게 맞서 싸우고 봉기하지 못하는 연약한 예술가다. 영화 내내 그의 최우선 목표는 어디든 숨어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상황에 그의 목숨을 살려준 것은 예술 그 자체였다. 블라덱이 피아니스트로 회귀함으로서 드디어 생명을 연장한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호젠펠트 대위는 블라덱이 연주하는 쇼팽의 g minor 발라드 1번을 듣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를 숨겨주고 돕는다. 영화는 발라드 1번의 코다 부분을 격정적으로 들려준다. 이 코다에는 서로 부딪히는 불협화음과 반음계의 선율이 특히 강조된다. 이 극단성은 마치 전쟁의 부조리와 불합리와 닮아있기도 하다. 나치즘은 인류에 유래 없는 잔학성과 야만성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쇼팽의 발라드는 그 모든 불편한 화음들의 끝에서 결국 하나의 힘, 하나의 조성으로 응집한다. 바로 g minor로 끝내 격렬하게 모이는 것이다. 이렇듯 참혹함 속에서도 그 안에 어떻게든 숨어있을 인간성을 찾아내는 것이 예술가의 목표일까? 한낱 개인의 생명을 연장하는 이유조차도 예술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애초에 예술이 생존에 실용적인 도움이 되는가? 어떻게든 휴머니즘을 고르고 발견하여 인류를 설득하는 것이 예술가의 숭고한 임무인 것일까?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난폭한 부조리 속에서 예술의 궁극적인 역할이 존재할 수 있는가?
전쟁이 끝나고 순식간에 권력과 힘의 위치는 뒤집어진다. 거꾸로 포로수용소에 갇힌 호젠펠트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달라고 간절하게 외친다. 무력에 의한 힘은 영원하지 않고, 절대 본질이나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블라덱은 마음 놓고 건반을 누르며 음악을 만들어가지만 이 평화는 너무도 조마조마하다. 언제든 총 소리 한 방이면 다시금 뒤집힐 수 있기 때문이다. “굶어 죽어가는 마당에 예술이 무슨 소용이 있어?”라며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피아노도, 시계도 팔았던 블라덱은 전쟁 앞에서 처량하고 가냘프고 빈약한 예술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예술의 숭고는 전쟁 앞에서 너무도 무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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