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영화 ‘위플래쉬’로 살펴보는 예술과 예술적 성취
음악으로 영화보기 #15
글 조세핀 (앙상블리안 칼럼니스트)
야망 넘치는 19살
영화 ‘위플래쉬’(Whiplash, 2014)의 주인공 앤드류는 첫 학기 신입생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속한 저학년 밴드의 연주곡은 그다지 연습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장 실력 좋은 학생들은 플레처 교수의 스튜디오 밴드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몰래 플레처 교수의 밴드의 곡들을 연습하고 결국 합류에 성공한다. 뉴욕 최고의 음악 학교, 그 중에서도 최고의 학생들만 모아놓은 이 밴드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앤드류에게는 절대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였다. 그래서 그는 교통사고로 온 몸이 피범벅이 되어도 무대로 미친 듯이 뛰어간 것이다. 사실 그는 조금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획일성과 폭력이 가득한 밴드의 분위기에도 끝내 기죽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플레처의 복수에 또다시 음악으로 맞서 야심차게 복수해나가는 앤드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의 야망은 플레처의 광기를 만나 단기간에 환상적인 성취를 낳은 것이 사실이다.
예술적 성취의 양면성
예술은 향유하는 방법에 따라 성격이 달라진다. 영화 ‘위플래쉬’의 감독 데미안 샤젤(Damien Chazelle, 1985-)은 고등학생 시절 음악을 할 때마다 “예술은 가볍고 즐거워야 한다.”와 “예술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를 고민했다고 한다. 일차적으론 전자는 예술 향유자의 마음, 후자는 예술 창작자의 마음에 우선 가깝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각자 삶에서 예술을 어느 정도의 우선순위로 놓고 있는지 질문하고 싶다. 예술을 위해, 또는 예술을 통한 자아실현을 위해 중요한 가치를 포기할 수 있는가? 가족을, 건강을, 사랑 또는 우정을, 경제적 풍요를, 사회적 평판을 포기하고 예술을 선택할 수 있는가? 아마 앤드류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예술을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치열한 예술인이 될 것이다. 플레처의 폭력적인 교육을 거치며 극단을 통해 ‘내면의 한계’를 넘어서는 예술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의 성취 안에 갇힌 그의 삶이 풍성하게 행복할 수 있을까? 그의 인생은 강렬하지만 너무나도 좁은 감각으로 제한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결과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은 예술적 영감을 얻지 않을까? 이 모든 영감의 합은 인류사에서 더 많은 질량의 행복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닐까?
즐거운 예술은 목적이 없다
단면만 보아도, 다각도로 살펴보아도 도저히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이런 고민에 빠질 땐 늘 철학자들의 시선을 빌려보는 것이 좋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 B.C. 384-322)의 저서 <예술의 목적>에는 예술에 대한 그의 고민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피타고라스 학파는 예술의 목적을 카타르시스로 보았고, 반대로 소피스트들은 쾌락주의적 예술을 옹호한 바 있다. 영화 ‘위플래쉬’로 볼 수 있는 예술 성취의 양면성은 사실 수천 년 이전부터 예술철학의 주요 주제였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야기하기도, 즐거움과 오락을 제공하기도 한다며 타협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다만 그는 예술을 두 가지 유형의 미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위대한’ 미이고 다른 하나는 ‘즐거움을 주는’ 미이다. 이러한 이원성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주는’ 미는 즐거움 외에 다른 목적은 없다고 보았다. 플레처는 학생들이 오락 같은 예술만을 배우러 학교에 온 것은 아니라고 여겼을 것이다.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찾아 온갖 의도적인 모욕을 퍼부은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감정의 끝자락을 폭발시키도록, 그래서 그 확장된 폭이 예술의 카타르시스에 도달할 수 있는 도움닫기가 되기를 바란 것이다.
그 정도면 잘 했어
플레처는 “너희가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보고 싶었어. 난 그게 꼭 필요하다고 봐. 세상에 That was alright, Good job 만큼 해로운 말이 없어. Good job으로 끝나는 것은 비극이야. 그리고 그게 바로 재즈가 죽어가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물론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은 예술인의 고통스런 숙명이다. 하지만 수단이 된 폭력은 답습이 된다. 폭력이 예술의 포용력을 증명하는 세상은 더 이상 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위플래쉬’는 예술가들이 그 정도면 잘 했다며 안심하지는 않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로 ‘위대한’ 예술은 어떤 카타르시스를 거쳐야 획득되는 것은 확실하다. 나만의 방식으로 삶에서 그 주도권을 잡는 것은 아마도 예술인의 또 다른 숙명이 된다. 하지만 그 방식은, 방식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성의 결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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