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영화 ‘아이 엠 러브’를 가득 채운 미니멀리즘 음악
음악으로 영화보기 #4
글 조세핀 (앙상블리안 칼럼니스트)
영화감독 루카 구아다니노(Luca Guadagnino, 1971-)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특유의 공통된 색채를 느낀다. 화면을 가득 채운 초록과 여름, 찬란한 햇빛, 소리 내어 흐르는 물, 과일과 음식으로 은유되는 욕구, 본능적이고 노골적인 성. 이외에도 구아다니노 감독의 작품세계에는 눈에 띄는 또 다른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바로 영화를 더욱 감각적으로 풍요롭게 뒷받침해주는 매력적인 배경음악이다. 그의 대표작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2018)도 그러했지만 오늘 살펴볼 영화인 ‘아이 엠 러브’(I am Love, 2011) 역시 그러하다.
영화에서 음악의 연출은 엄청난 힘을 가진다. 음악은 장면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도 하고, 숨겨진 메시지를 암시하기도 한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영화와 음악의 유기적이고 효과적인 연결을 위하여 미니멀리즘(Minimalism)음악을 선택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에게 뮤즈가 된 음악가는 현대 포스트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표 작곡가인 존 애덤스(John Adams, 1947-)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오프닝에도 애덤스의 곡 ‘Hallelujah Junction’이 사용되어 청량하고 맑은 이탈리아의 여름을 인상적으로 묘사한 바 있지만, 나아가 영화 ‘아이 엠 러브’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애덤스의 음악만으로 사운드트랙을 전부 채웠다. 구아다니노 감독은 미니멀리즘 음악, 그리고 애덤스의 음악관에 완전히 매료된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미니멀리즘 음악이 무엇이고, 애덤스의 음악이 어떤 매력을 가졌기에 구아다니노 감독의 마음을 독차지한 것일까.
미니멀리즘 음악은 최소한의 재료로 단순한 음악을 추구한다. 이는 20세기의 복잡하고 수학적이고 실험적인 현대음악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것이다. 미니멀리즘 음악에는 방향이나 목적, 서사가 없어도 괜찮다. 때로 단음 또는 짧은 모티프로 한 자리에 계속하여 머물러도, 그 방황 자체도 음악이 된다. 존 애덤스의 음악은 이러한 미니멀리즘에 뿌리를 두었지만 중세 선법, 바로크, 종교 음악, 낭만주의의 화성, 인상주의의 표현, 재즈 등 다채로운 소재들을 더했다. 덕분에 미니멀리즘의 성격을 지니면서도 특유의 분위기와 낭만적, 감성적 색채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이 엠 러브’에서 애덤스의 음악이 인상적으로 사용된 몇 장면을 짚어보자. 영화는 전체적으로 대사의 양이 적은 대신 클로즈업된 인물 표정의 변화를 길게 담았다. 언어적 설명이 구구절절 나열되지 않으니 관객들은 마치 시를 읽듯이 예민하게 영화 속 행간의 의미를 찾으려 곤두세우게 된다. 배우 틸다 스윈튼(Tilda Swinton, 1960-)의 무게감 있는 연기와 결합된 음악은 단순한 장면 묘사의 기능을 넘어선다. 여기서 음악은 청각적 공백을 메움과 동시에, 함축된 감정을 풀어내는 비언어적 조수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것이다.
그 예로 주인공 엠마와 안토니오의 야외의 풀밭 위 정사 신을 살펴보자. 넘치는 햇살 아래 흐르는 땀방울과 붉게 얼룩덜룩 올라온 피부, 그리고 꽃잎과 벌 날개의 결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교차하여 담아낸 이 장면은 마치 아담과 이브의 본능적인 태초의 사랑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격렬함 뒤에는 현악기 중심의 순진무구하고 평온한 음악이 흐르고 있다. 음악은 뚜렷한 형식적 발전 없이 오로지 느리게 현의 진동에 충실하며,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장면의 분위기는 순간의 시간에 머무는 듯 명상적이고 평화롭게 덧입혀진다. 마치 진실은 이토록 자연스러운 것, 불편하지 않은 것임을 평생 인형처럼 공허하게 살아온 엠마에게 일깨워주는 듯하다.
반면 에도아르도의 장례식 장면에서는 엠마의 깊은 고통이 음악을 통해 증폭된다.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해체되고 오로지 ‘슬픔’만을 조명하는 하나의 선, 즉 단선율의 음악이 흐른다. 미니멀리즘으로 홀로 남은 이 감정의 선은 2도씩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중심음을 위주로 한 자리에 머무르고 있다. 마치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율처럼 리듬의 움직임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조금 오르고, 조금 내려가며 계단에 갇혀버린 듯 느리고 우물쭈물한 발자국만 남았다. 비극 속에서 삶의 능동성을 잃어버린, 하지만 아예 멈추지도 움직이지도 못하고 모든 시간이 중단된 엠마의 혼란을 응시하는 음악인 것이다.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는 친절하지 않다. 상징과 함축이 가득하여 수수께끼를 풀 듯 끊임없는 유추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애덤스의 음악은 큰 힌트가 된다. 미니멀리즘의 단순성을 기본으로, 이에 더하여 에너지의 반복 또는 해체를 구조적으로 들려준다. 특히 ‘아이 엠 러브’처럼 1인 캐릭터 중심으로 그의 심리를 끝까지 쫓는 영화에선 음악이 더욱 큰 권력을 가진다. 영화의 배경을 감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인공의 내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암시하고 드러내는 힘. 영화 내내 대사와 음악은 공존하지 않는다. 대사가 있는 부분에선 음악이 멈추고, 음악이 흐르면 대사가 멈춘다. 어쩌면 구아다니노 감독에게 애덤스의 미니멀리즘 음악은 제2의 대사, 제2의 언어로 구사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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