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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죽고 싶을 때...
트라우마의 영향

“제 우울증의 원인은 무엇인가요?” 진료시간에 자주 듣지만 항상 대답이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의 심리상태의 이유를 딱 한마디로 정리하여 말하기는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신과 진단과 치료에서도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는 증상 관리와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 회복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은 자신이 왜 우울한지, 왜 불안한지 스스로 모르겠다, 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지 도통 알 수 없다고 하는 분들이 많은데, 종종 저도 함께 길을 잃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물론 이 길을 찾아 나가는 것은 정신과 의사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특별한 이유를 현재에서 찾지 못한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대부분의 트라우마는 스스로 자연회복이 되기 마련이지만 일부는 아주 오래전 과거의 일이라도 그것이 ‘트라우마’이기 때문에 십 수년, 혹은 더 긴 세월 동안 여전히 풍화되지 않고 그 여파가 현재에 도달하기 충분합니다.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것이라는 위로의 언어도, 다른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었던 활동들도 트라우마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는 일반적인 스트레스의 기억과는 생성 메커니즘, 저장 방식이 다르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다루는 방식 또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당사자도 꽤 시간이 지난 탓에 ‘그 일’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스스로가 비겁하게 느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일’ 탓은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고 이미 스스로에게 되뇌는 정도에 이르기도 합니다. 결국 ‘나는 오래전부터 이런 사람이었지’라고 생각하며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어려움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지내오기도 합니다. 지금의 우울감, 불안감, 두려움, 그리고 죽고 싶은 마음은 과거의 ‘그 일’과는 더 이상 줄 그을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어째서 오래 전의 트라우마는 지금 현재를 사는 나를 살고 싶지 않게 하는 걸까요? 정신의학적으로 트라우마 사건이란 죽음, 심각한 부상을 겪거나 위협을 당한 경우와 모든 종류의 성폭력이 해당됩니다. 이는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큰 심리적 충격을 주는데, 감히 그들이 겪은 일의 충격정도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트라우마 경험을 한 뇌와 몸은 그저 깜짝 놀라는 정도가 아닌 생존에 기반한 반응으로 대응하며, 그 에너지는 몸속에 갇히게 되고 오랜 시간 트라우마 반응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옅어지기보다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안정적으로 일정하게 방사선을 뿜고 있는 방사성동위원소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흔히 경험하는 반응 중 하나는 인지가 예전과는 다르게 변화하는 것인데 하나는 세상은 위험하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는 생각입니다. 한 사건을 겪은 생존자는 세상을 그리고 스스로를 대하는 인지가 완전히 바뀌어 있습니다. 세상은 그동안 내가 살아오던 그 세상 그대로인데 사건을 겪은 생존자는 이전과 같이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지 못하거나 해보지 않은 것에 도전하기 어렵게 됩니다. 만약 다행히 주변사람들이 도와주고, 위로해 주고,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주고, 상황이 잘 풀려 정말 좋은 일들도 종종 생긴다면 트라우마의 자연회복은 촉진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해버린 인지방식이 오랜 시간 동안 굳혀지게 되고, 이제는 무엇 때문에 힘든가라는 질문에 쉽사리 오래 전의 트라우마가 떠올리기는 어렵게 됩니다.     


트라우마를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꼭꼭 닫아놓은 판도라의 상자에 다가가는 것과 같습니다. 꼭 상자를 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그것이 그렇게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당사자에게도 치료자에게도 몹시 힘든 작업인데 그것을 시도하는 분들에게는 더더욱 힘든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나를 괴롭히는 과거의 고통의 상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의 괴로움이 사실은 지금의 어려움이 아니라 '그 일'에서 비롯된, 상자 안에서의 무엇 때문에 발생하는 흔한 '반응'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마리를 찾는 것은 치료의 시작점을 찾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상자를 다루려고 하고 있다면 이미 엄청난 용기를 내고 있는 것입니다. 트라우마 기억에 다가가는 것은 아마도 그 일에 대해 오랜 시간 동안 가졌던 죄책감이 사실은 그럴만한 잘못이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금방 그렇게 되지 못하더라도 그 마음을 오랫동안 끌어안고 버텨온 당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한편, 그 일로부터 세월이 흘렀을 수도 있는데, 당신은 그때보다 조금은 성장하거나 혹은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면 지금은 분명한 성인이 되어있을 겁니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이전보다 최소한의 힘과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 힘은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충분한 힘이 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잘 지든 못 지냈든 간에 여전히 버텨오고 견디어 지금 여기에 ‘사라지지 않고 존재(being)’한 당신에게 한번 더 무한한 칭찬을 드립니다. 


윤지애 을지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조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위 글은 헬스조선의 연재 <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의 ["왜 우울한지, 왜 불안한지 모르겠어요"… '과거 상자'에 다가가보세요]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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