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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당신의 마음에 남긴 상처

지구온난화가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

‘음식물 쓰레기를 누가 갖다 버리냐’는 사소한 문제로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고 출근한 아침. 화나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진료를 시작하는데, 이 날따라 유난히 환자분들도 힘든 일들만 쏟아냅니다. 우울하고, 무기력하고, 짜증 나고, 노력한 일들 실패하고, 가족과 다투고......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환자분들이 줄줄이 힘들어하는 날 더 힘든 것이 사실이지요. ‘대체 오늘 하루는 왜 이렇게 안 풀리는 것일까?’ 고민하던 차, 스마트폰에서 ‘띵동’ 알림이 울립니다. 사진 앱에서 ‘1년 전 오늘’의 사진을 모아 보여주는데, 이럴 수가! 1년 전 오늘도 남편과 데이트하던 중 사소한 일로 크게 싸웠던 것이 아닌가요?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오늘의 모든 일들이 날씨 때문은 아닐까요?     


2024년은 역대 ‘최악의 여름’으로 꼽히는 2018년에 비해 폭염 일수와 열대야 일수가 더 많아 새로운 ‘최악의 여름’으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로 인해 폭염을 비롯한 ‘극단적인 날씨’는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극단적인 날씨’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1990년부터 2020년까지 고온 노출과 정신건강의 관계에 대해 출판된 논문 53편을 분석한 한 연구에 따르면, 평균 온도의 상승은 부정적인 정신건강 상태와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었습니다. 고온 상태가 몇 일 또는 몇 주 간 지속되면, 사람들의 일상생활의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이 감소하게 됩니다. 술이나 담배를 더 찾기도 하고, 타인에게 더 쉽게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자살이나 자해하고 싶은 충동이 커지기도 합니다. 

     

고온의 날씨가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직관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그 안에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은 복잡한 생리학적 기전들이 숨어있습니다. 높은 온도는 우리의 기분, 판단력, 기억력, 주의력 등과 관계된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과 세로토닌 균형을 붕괴시킨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은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의 발병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며, 정신과 약물의 작용 기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한편, 요즘 학계에서는 염증과 정신질환의 관계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활발하게 발표되고 있습니다. 신경-염증 가설(neuro-inflammatory hypothesis)이라 불리는 학설인데, 이 관점에서 고온은 우리 몸에 염증 반응을 활성화하고, 염증 물질은 뇌의 여러 부위에 악영향을 끼친다. 기분을 담당하는 영역 역시 염증 물질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고온으로 인한 수면 장애가 다른 정신건강 상태에 미치는 영향도 있습니다. 열대야로 꼴딱 밤을 새운 뒤 아침부터 짜증이 나고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경험은 대한민국의 여름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우 흔하지요. 필자가 아침 눈 뜨자마자 남편과 싸운 것 역시 열대야로 밤잠을 설친 영향이 있을 겁니다.


이 연구에서 밝힌 또 다른 의미 있는 사실은, 폭염이 정신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고령자와 열대 및 아열대 기후에서 더 크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원래 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더위에 더 잘 견디지 않을까?’하는 오해도 있지만, 원래 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한계에서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단 몇 도의 온도만 상승해도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또한 고령자들은 외부 온도 변화에 대응하여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정신 및 신체의 부정적 결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사실은 이미 ‘고령 사회’를 넘어 ‘초고령 사회’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그리고 ‘온대 기후’가 아닌 ‘아열대 기후’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안타깝지만 환자들과 필자 자신의 정신건강을 걱정하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필자에게 고온과 지구온난화를 없앨 수 있는 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약간의 변명을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소소한 노력들을 기울이고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필자의 전문성을 살려, 무더위에 필자를 찾아온 환자들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한 마디 위로를 건네며 설레는 가을을 함께 기다리려고 합니다.    

 

오늘 당신이 힘든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자연환경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의 날씨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희망적인 소식은,
우리의 기분을 나아지게 만드는 맑고 쾌청한 날도 있다는 겁니다.
그날 더 즐겁고 활기차기 위해 오늘의 짜증 나는 날씨도 헤쳐나가 봅시다.


박선영 국립정신건강센터 과학기술서기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 위 글은 헬스조선의 연재 <당신의 오늘이 안녕하길>의 [무더위가 당신의 마음에 남긴 상처, 알고 있었나요?]를 통해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 


[참고 문헌] 

Liu J, Varghese BM, Hansen A et al., Is there an association between hot weather and poor mental health outcomes? A systematic review and meta-analysis, Environment International 15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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