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리
구월의 어느 날 세차게 내리는 비는 추수를 앞둔 한 농부의 식은땀처럼 곧 다가올 청량한 가을을 시사했다. 본인의 몸 70퍼센트는 물이라는 것을 잊은 대중들이 비를 피하기 위해 몸서리쳤다. 축축이 젖어가는 내 바지 단과 발걸음에 느껴지는 이질감은 나 또한 저들과 다를 것 없는 어린아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했다.
최근에 예비군을 다녀왔다. 정신교육으로 틀어준 호국 순열들의 영상을 보며 큰 희생에 감사했다. 하지만 한 편으론, 국방부가 나에게 “그러니까 너도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어야 해”라며 강요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현역 군인 시절 비합리적이고 자유가 없는 군대가 너무 싫어서 내가 대한민국에 군인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었다. 징병제 국가에서 태어난 현실이 한없이 밉기도 했다. 민족 열사들은 자발적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순간 저출산을 이유로 젊은이들에게 아이를 낳게 하는 법안이 통과된 불쾌한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차고 있던 군번줄이 목을 옥죄는 기분이 들어 곧바로 풀어버렸다.
지루한 훈련 때문에 떨군 시선에 줄지어 지나가는 개미가 비쳤다. 그날에 우린 개미굴을 파기 위해 태어난 개미였다. 차라리 본능에 대의를 이루려는 뜻이 새겨져 있더라면, 새로운 뜻을 가진 철인이 고결한 사상을 새워 우리들을 고취시켜 줬다면 한결 자유로울 것 같았다.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개미굴이라면 차라리 사라져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미숙한 상상도 해보았다.
몸 담고 있는 공직사회는 경쟁이 없고 승리자가 없다.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이 마냥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얕은 좌파적 성향은 날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 들어 멋진 신세계, 1984, 이방인 등 디스토피아 또는 허무 소설들이 손에 잡혔다. 책을 읽는 순간 거울신경세포는 한 글자 한 글자 활자 안의 음산한 에너지를 받아들이며 푹 꺼진 소파에 몸을 맡기듯 감정들은 힘을 잃었다. 신기하리만큼 비슷한 책들이 머릿속 서재를 채웠다.
전체주의를 경계하고 삶의 무상함을 역설한 저자의 의도가 신의 형상을 한 전 세계 집단 무의식을 자석처럼 끌어들였다. 이 책들이 손에 잡힌 이유는 아마 내 삶보다 부정적인 것들을 보며 위로를 받으라는 내 무의식의 뜻이었을까
이 소설들이 주는 깨달음의 위용은 가히 경탄할 만 하지만 나는 노인과 바다, 파우스트가 좋다 그리고 데미안이 좋다. 각혈하듯 싸우는 인간 산티아고, 파우스트, 싱클레어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큰 귀감이 된다.
데미안을 들을 때면 내가 드디어 세상에 진리를 조금이나마 깨우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눈과 귀를 닫은 채 플라톤의 사상을 신들린 듯 말할 수 있을 가능성, 요정의 날개 위에 세상의 주춧돌이 설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인간은 파멸할 순 있어도 패배하지 않고, 노력하는 동안에는 항상 방황하며 덧없는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칭기즈칸, 진시황, 솔로몬의 이야기로 우리는 이미 삶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다 가졌어도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그래서 각 개인은 삶에 고결한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
나는 내가 빚이 없다는 것, 감옥에 가지 않았다는 것,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지도 스스로를 위안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대중들 속에 숨어 워터밤과 흠뻑쇼를 즐기고 싶지 않고 다들 보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오징어 게임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도피하듯 여행을 떠나고 싶지 않다. 의심보다 의미를 찾는 탐구를 하고 싶다. 봇물 터지듯 뿜어 나오는 생각들을 그냥 흘러가도록 두지 않고 붙잡아 두고 싶다. 시끄러운 잡음이 아닌 내 몸을 관통하는 청량한 종소리가 듣고 싶다. 모든 에너지를 온전히 나에게 쏟고 싶다.
이따금 카톡 방에 스페인의 바다를 보내는 현송이 와 싱가폴의 밤을 보내는 인호를 보면, 이중섭의 황소가 겹쳐 보인다. 드넓은 대지를 돌며 끊임없이 자유를 반추하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자랑스러운 마음과 사무치게 부러운 마음이 양립한다.
삶의 부조리로 인해 부정, 긍정, 사랑 세 단어를 끝맺지 못한 알베르 카뮈를 기리며 오늘도 카인의 표식을 가진 반항하는 인간2 정혜찬 최고의 선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