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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아치는 욕망의 파도, 국립극단 연극 <만선>

자본의 바다에서 몰아치는 욕망의 파도, 국립극단 <만선>

국립극단 연극 <만선>

자본의 바다에서 몰아치는 욕망의 파도, 국립극단 연극 <만선>




심재찬 연출의 <만선>은 2021년 초연 이후 2023년 다시 명동예술극장에서 관객들을 맞았다. 연출가는 초연과 비교하여 슬슬이, 도삼이, 도삼의 친구 연철이 등 다음 세대들이 쉽게 스러지는 비극적인 내용에 중점을 두고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슬슬이가 범쇠에게 반격을 가하는 장면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 젊은 세대의 나이에 맞게 캐스팅하여 젊은이들의 희생을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했다. 



살아남은 세대와 죽은 세대


<만선>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품이다. 사실주의는 사회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둘 사이의 면밀한 관계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작품은 전라도의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 속 계급화된 사회와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사회적 비극을 그려낸다.


첫 째로 윗세대의 욕망과 이로 인해 희생되는 아래 세대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 가장 먼저 인식되는 곰치와 구포댁 어린 자식들과 연철, 슬슬이 뿐만 아니라 임제순이라는 윗세대에게 반항하지 못하는 곰치 또한 그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제순은 자신이 가진 것을 움켜쥔 채 놓지 않으려 한다. 이런 제순의 억압은 반작용을 일으켜 곰치의 만선에 대한 욕구에 더욱 불을 지핀다. 


곰치는 중선배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중선배를 구입하고 레이더를 달자는 도삼과 연철의 의견을 무시한다. 이 장면 또한 연출이 신경을 많이 쓴 장면이라고 밝혔는데, 산업화 시대에 새로운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고집만을 내세우는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유시민 작가가 말한 인터뷰 내용이 생각났다.“지금 60대 들은 자식들이 이야기하면 ‘네가 뭘 아는데!’라며 역정을 낸다. 아주 고약한 세대다. 그래서 젊은이들에게 그들을 믿지 마라 답을 구하지 마라 그냥 부딪히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몇 세대를 거쳐 단단해진 견고한 벽에 부딪히다 타박상을 입기 십상이다. 


임제순이 불어 넣은 산소에 더욱 강하게 타오르는 곰치의 욕망은 그의 자식들과 딸의 애인 연철이까지 집어삼키는 화마가 된다. 이렇듯 <만선>에 나타난 갈등은 곰치와 그 아래 세대뿐만 아니라 제순과 어쩌면 그 윗세대까지 포함하여 다층적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비극은 도삼과 연철이 죽은 후 갓난아기를 배에 띄워 보내는 장면에서 방점을 찍는다.



(이미지 출처 : 국립극단 홈페이지)



무자비한 자본의 횡포


두 번째로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극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무자비한 자본의 횡포이다.


선주 임제순도 곰치의 부서 잡는 실력을 몰랐을 리가 없다. 분명 부서 때가 사태인 지금 곰치가 배를 끌고 나간다면 많은 부서를 잡아 금방 빚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순은 이런 기회의 순간에 배를 묶는다. 여기서 ‘기회의 불균형’이 은유된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렇게 찾아온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점점 더 소수로 국한되고 있다. 


또 특이한 점은 임제순과 범쇠는 ‘이름다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름은 곧 주체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로 주체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은 자본가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주체성이란 스스로의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지지 못한 이들은 자본에 종속되어 스스로의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없는 ‘자본의 억압’을 받고 있는 상태이다.


 


고전적 스토리에 힘을 실어주는 스펙터클


<만선>의 무대는 남해안의 조그만 어촌 마을 속 낡은 초가, 잡생선 몇 마리 널린 장대 줄과 어업을 위한 밧줄과 그물이 놓인 초라한 곰치네 집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어딘가 기울어지고 찌그러져 있는 곰치의 낡은 집이다. ‘제대로 섰다’는 곰치의 말과는 다르게 집은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 이런 무대는 곰치의 기울어진(잘못된) 욕망이 그의 집(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있음을 시각화한다.


작품의 제시적 배경인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곰치의 만선에 대한 욕심도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을 집어삼켰다. 곰치와 구포댁이 물에 젖은 모습으로 끝나는 마지막 모습은 언젠가 자신의 욕망에 스스로 집어 삼켜질 곰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미 한 번 젖은 몸은 아무리 새 찬 비바람이 몰아쳐도, 아무리 깊은 바다에 들어가도 젖은 상태는 똑같기에 완전히 초연해진 인물을 보여주기에 적절한 연출이었다. 


무대 1열에서 관극을 하며 곰치와 구포댁에게 향하는 물을 직접 맞으면서 그들의 삶과 우리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는 무대 예술만이 전해줄 수 있는 현장성의 묘미를 강렬하게 느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이미지 출처 : 국립극단 홈페이지)



아무도 희생당하지 않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염원


우리는 무작정 곰치의 만선에 대한 욕망을 비난할 수 있을까? 파우스트의 '인간은 노력하는 한 고통받는다'는 구절처럼 인간은 계속해서 욕망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다. <만선>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나의 욕망이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는가?'이다. 제순이 곰치네 가족에게 준 고통과 곰치가 가족들에게 준 고통을 생각해 보자. 곰치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계속해서 바다와 싸웠고 이런 곰치는 때때로 지독한 운명에 투쟁하는 '오이디푸스' 같은 그리스 비극적 영웅으로 칭송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영웅은 자본주의 사회의 불공정과 불합리함을 탈피하고 시스템을 전복시켜 줄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것은 임제순과 같은 폭압적인 자본가. 더 나아가 자본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곰치의 세 아들과 연철의 죽음은 비단 곰치의 개인적인 욕망이 빚어낸 죽음이 아니라 자본가의 끔찍한 횡포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죽음으로 인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글: 예술도서관 박두환

대학에서 연극을 전공하고 예술도서관 아카데미를 통해 수많은 예비 연극인들을 만났다.

건강한 예술 교육자가 되기 위해 공연 관람과 글쓰기, 창작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다. 

연극과 공연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그렇게 얻은 삶의 지혜와 아름다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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