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경영 함께 공부할까요? 22화
❍ 예술경영 함께 공부할까요? 22화. 4줄 요약
✦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는 당시 한국이라는 브랜드의 원대하고 절실한 목표
✦ 브랜딩의 방향을 이끌고 구성원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원대하고도 구체적인 목표는 매우 중요하다
✦ 일반경영 사례. 미국을 냉전의 승리자로 만든 '우주경쟁', 미합중국 (U.S.A)
✦ 예술경영 사례. 한국의 문화를 세계로 알리는 선두주자, C
❍ 1p 2022년의 뜨거웠던 축구열기
2002년의 뜨거웠던 축구 열기
2022년, 국제축구연맹 FIFA가 주관하는 카타르월드컵 당시 피파의 공식 콘텐츠 플랫폼인 '피파 플러스'에서
월드컵 역사상 최대의 이변 몇 가지를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던 브라질이 독일에 7-1로 진 사건,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축구 불모지인 북한이 수비축구의 최강자 이탈리아를 1-0으로 격파한 사건 등
아직까지도 수많이 회자되는 여러 이변을 모아서 정리했지만
한국인들이 바로 떠올릴 월드컵 이변은 바로 2002년 한일웓드컵에서의 4강 진출이다.
피파 플러스는 2002년 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한국이 이탈리아를 극적으로 꺾은 승부를 최대 이변 중 하나로 뽑았다.
피파 플러스 외에도 월드컵 시즌 때마다 각 언론사에서 꼽는 월드컵 최대의 이변에는
꼭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한국의 4강 진출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다.
그만큼 축구의 변방인 아시아, 그것도 이전에는 눈에 띄는 성과를 보이지 못하던 한국축구가
세계 축구 4위의 성적을 거둔 건 모두에게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은 유치 과정부터 결과까지 매우 극적으로 전개된 월드컵이었다.
그 전까지 아메리카와 유럽 대륙이 번갈아 가며 개최하던 월드컵에서 벗어나
다른 대륙에도 유치의 기회를 줘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됐다.
당시 기준에서 그나마 세계와 겨룰 수준이 되고 축구에 대한 관심이 높은 나라가 한국과 일본이었기에
두 국가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 끝에 공동개최의 형식으로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을 개최하게 된다.
아시아 최초로,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월드컵, 숙명의 라이벌 일본과의 공동개최,
16강 토너먼트 진출은 커녕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대패를 거듭했던 월드컵에서의 과거 등
여러 요소들이 얽히며 축구대표팀과 축구팬을 넘어 한국사회 전체가 월드컵에서의 좋은 결과를 기대했다.
하지만 당시 한국축구대표팀의 상황은 너무도 좋지 않았다.
바로 직전 월드컵에서는 네덜란드에 5대0으로 졌고, 아시안컵 등 지역대회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이 모든 악순환을 끊기 위해, 네덜란드의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다.
히딩크 감독은 부임하자마자 한국 축구를 바꾸려고 노력했다.
체계적인 훈련시스템을 도입하고, 수많은 선수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장점을 살리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으며 여러 선진적 유럽축구 문화를 한국축구로 도입했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한국축구대표팀은 월드컵에서 첫 승 뿐 아니라 첫 토너먼트 진출, 첫 8강 진출, 끝내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이뤄낸다.
이러한 전성기를 누린 한국축구는 이후 부흥기를 맞아 크게 발전했다.
체계적인 훈련시스템에 대한 필요, 수평적인 분위기에서의 유소년 선수 훈련,
해외리그로의 적극적인 진출 모색 등 여러 가시적인 발전을 이뤘고
지금 한국축구 대표팀은 세계의 강호들과도 겨뤄볼 수 있을만한 팀이 되었다.
이는 2002년 한일월드컵의 신화를 이뤄내고 한국축구의 체질 자체를 바꾸려 노력한 거스 히딩크 감독의 덕이 매우 크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브랜딩 칼럼에서 함께 살펴볼 히딩크 감독의 가장 특출난 장점은 아직 언급하지 않았다.
축구대표팀 선수들 뿐 아니라 한국축구계, 정재계, 더 나아가 전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의 어록에서도 엿볼 수 있는 '원대하고 명확한 목표와 비전 설정'이다.
우리는 이미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배가 고프다 (But, I'm still hungry).
거스 히딩크 당시 한국축구대표팀 감독
(조별리그 포르투갈전에서 승리하고 16강 진출을 달성하고 난 뒤의 인터뷰에서)
❍ 2p 브랜드의 원대한 목표는 '북극성'과도 같다.
브랜드의 원대한 목표는 '북극성'과도 같다.
당시 모든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왜 월드컵 첫 승뿐 아니라 16강 진출까지 이뤄냈는데 부족하다고 하는거지?"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데 너무 자만하는 것 아닌가?"
등의 의견들이 나왔지만, 이후 축구대표팀은 끝내 4강까지 진출했다.
히딩크 감독은 축구대표팀을 이끄는 리더였고, 월드컵에 참가한 축구대표팀의 목표는 당연히 우승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1승조차 거두지 못한 탓에 모든 사람들은 '한국은 우승을 꿈도 꾸지 못할 팀이야'라는 생각을 품었고, 이는 스포츠에서 상대와 겨룰 때 절대 가져서는 안될 패배적인 생각이란 걸 히딩크 감독은 알았던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 감독에 선임될 때부터 한국축구의 패배주의를 없앴고 월드컵 참가팀으로서의 '우승에 대한 비전'을 새로이 심었다. 선수들은 유럽 축구팀과 경기할 때 주눅들었던 마음가짐을 고치고, 당당히 그라운드 위에서 겨룰 수 있었고 이러한 비전과 그를 위한 체계적인 계획에 감명받은 축구협회 주요임원이나 대표선수 소속팀들은 히딩크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또한 한국축구팬들 역시 대표팀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진심을 다해 응원할 수 있었다.
2002년 히딩크의 리더십은 우승을 향한 '원대한 목표와 비전'을 세웠기 때문에 가능했고
이는 한국축구를 크게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것을 브랜딩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뿌리 깊게 자리한 패배주의, 후진적인 운영방식에 헤매던 '한국축구'라는 브랜드를
명확한 비전과 그에 맞는 실행력을 갖춘 리더가 새롭게 만든 것이다.
브랜딩에 있어 원대한 목표와 비전은 브랜드를 지속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힘을 준다.
충분한 실행력과 기술이 있어도, 그것을 개발하며 브랜드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이유'를 마련해야한다.
만약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이 16강에 만족하고 우승을 꿈도 꾸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똑같은 체계적인 훈련을 거쳤다 하더라도 4강에 오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브랜드의 원대한 목표는 구성원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강력한 구심점을 만들어준다.
구성원들이 화합하고 결집하여 브랜드를 성장시킬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합리적이고 닿을 수 있는 듯 하지만 실제로 이뤄내기 위해서는 큰 노력을 거듭해야 할 목표.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현재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에 맞으며, 힘들게 노력할 가치가 있는 목표.
그런 목표를 제시할 수 있는 브랜드라면,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최선을 다해서 브랜드를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구성원들이 만드는 브랜드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쉽게 굴하지 않는 강한 브랜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원대하고 구체적인 브랜드의 목표는, 마치 거친 사막 한복판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하는 북극성과도 같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따라서 오늘은 훌륭한 목표설정으로 끝내 눈에 띄는 성과를 이뤄낸 두 브랜드,
세계최강국으로 군림하며 아직까지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뽐내는 '미합중국 (U.S.A.)',
또 한국의 콘텐츠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CJ'를 예시로 함께 살펴보려 한다.
❍ 3p 일반경영 사례로 보는 브랜드의 '원대한 목표' : 미합중국 (U.S.A.)
미국을 냉전의 승리자로 만든 '우주경쟁', 미합중국 (U.S.A)
미국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국가이다.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 각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학문,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발전을 이끌고 있다.
지금이야 미국이 다른 나라가 넘보기 어려운 강대국이고,
20세기 초부터만해도 풍부한 물자와 경제력을 바탕으로 무시할 수 없는 국력을 과시했지만
그런 미국에게도 꼭 넘어야 할 숙명의 적이자 라이벌이 있었다.
바로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소련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과 소련은 본격적인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각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질서를 선도하는 국가로서
세계의 질서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2차대전을 일으켰던 독일을 서독과 동독으로, 내전을 겪은 한국을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질서를 따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예시가 있다.
특히 두 국가 사이의 경쟁은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의 개발을 두고 격화됐다.
더 멀리 미사일을 보내 언제라도 상대방을 타격할 수 있는 ICBM으로 군사적인 우위를 점한다면
경쟁에서 앞설 수 있기 때문에 두 나라는 앞다투어 미사일을 개발했다.
그리고 소련은 세계 최초로 ICBM을 개발하며 미국보다 한 수 앞섰고
또한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쏘아올리며 미국에게 두려움과 충격을 안겼다.
또한 소련은 미국의 코앞에 있으며 인접국가인 쿠바에 미사일을 갖다놓으려 했다.
미국의 모든 사람들은 언제라도 소련에 추월되고 전쟁에서까지 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했고
제 35대 대통령인 존.F.케네디는 이러한 분위기를 일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인공위성까지 쏘아올리며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소련에 승리할 수 있는 법,
그것은 바로 인간을 달에 보낸 후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은 NASA의 천재 과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에게 미국이 소련을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지 물었다.
브라운은 미국이 초대형 로켓 분야에 있어서만큼은 소련보다 확실히 앞서있는 점을 고려,
사람까지 태울 수 있는 거대한 로켓을 달에 보내 착륙시킨 후, 다시 지구로 돌아올 수 있을만큼의 기술을 개발한다면 미국은 소련을 이길 수 있다고 단언했다.
또한 사람이 우주에 있는 모습을 찍어 세계에 공개한다면
전세계의 국가와 사람들이 우주경쟁에서 미국이 이겼다고 판단할 수 있을만큼
파급력도 큰 작전이기에 케네디 대통령은 곧바로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한다.
For the eyes of the world now look into space, to the moon and to the planets beyond,
and we have vowed that we shall not see it governed by a hostile flag of conquest, but by a banner of freedom and peace...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We choose to go to the moon in this decade and do the other things, not because they are easy, but because they are hard,
because that goal will serve to organize the best of our energies and skills,
because that challenge is one that we are willing to accept, one we are unwilling to postpone,
and one we intend to win, and the others, too.
세계의 눈이 지금 우주를 향해, 달과 그 너머의 행성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맹세했습니다. 우주가 적의에 차 있는 정복의 깃발이 아닌, 자유와 평화의 깃발 아래 있도록 할 것을...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달에 갈 것입니다.
우리는 10년 내에 달에 갈 것이고, 다른 일들도 할 것입니다. 쉽기 때문이 아니라,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목표는 우리의 최고의 기술로 최선을 다하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며,
우리가 미루지 않고 기꺼이 받아들이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며,
이번 뿐 아니라 다음 도전에서도 승리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존.F.케네디 제 35대 미국 대통령 - 1962년 라이스 대학교에서의 연설
당시의 기술로 10년 내에 유인 달탐사 작전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였지만
케네디 대통령의 이 연설 이후 동기를 부여받은 수많은 인력이 NASA로 몰려 일하고자 했다.
또한 소련이라는 명백한 적에 대한 불안감과 세계 최초의 유인 달탐사라는 의미있는 목표와 비전 아래에
모든 과학자들이 똘똘 뭉쳐 끝내 기술을 개발하여 작전에 성공했다.
이후 미국의 첨단우주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소련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며
미국은 세계최강국으로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케네디 대통령이 제시한 비전대로, 다음 도전에도 지속적으로 승리하고 성공한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에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국민들을 하나로 뭉칠 방법은
'미국'이라는 국가 브랜드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안기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지속적으로 소련과 다른 국가들의 도전을 이기고 최고의 국가로서 나아가기 위해
케네디 대통령은 유인 달탐사라는 원대한 목표와 비전을 제시했다.
이를 통해 당시의 미국 국민들과 과학자들을 하나로 똘똘 뭉쳐 목표를 이뤄냈고
아직까지 세계 최강국이라는 빛나는 브랜드를 이룩하는 데 성공하고 만 것이다.
❍ 4p 예술경영 사례로 보는 브랜드의 '원대한 목표' : CJ
한국의 문화를 세계로 알리는 선두주자, CJ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수많은 유명 제작사들의 시작영상이 익숙할 것이다.
워너브라더스, 21세기 폭스, 파라마운트, 도호 뿐 아니라
한국의 제작사들도 멋진 제작사 시작영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바다 한복판의 섬에서 아이들이 폭죽을 쏘아올리는 (구) CJ엔터테인먼트의 영상은 매우 유명하다.
CJ는 한국 문화콘텐츠의 제작, 배급, 해외수출 등을 모두 담당하는 가히 문화계의 공룡기업이다.
영화에서는 2000년 개봉되어 비평적으로도 흥행적으로도 성공해 이후의 영화산업발달에 큰 역할을 한 '공동경비구역 JSA'부터 '명량', '국제시장' 등 현대의 흥행작까지 모두 제작을 해냈으며, 국내 최대의 멀티플렉스 프랜차이즈 'CJ CGV'를 보유하여 안정적인 배급도 보장받는다.
TV 쇼 부문에서는 트렌디하고 재미있는 콘텐츠를 제작하여 예능종편채널의 기준이 된 'tvn',
영화전문채널이자 드라마콘텐츠 제작채널 'OCN', 'CATCH ON'
그리고 <스위트홈>, <더 글로리> 등 넷플릭스에서 국내외를 막론하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가장
국제적인 수준의 콘텐츠를 제작하는 '스튜디오 드래곤' 등이 모두 CJ의 엔터테인먼트 사업부 소속이다.
음악에서는 오랜 기간 음악전문편성채널로 명성을 쌓은 'Mnet'을 소유하며 'KCON', 'MAMA' 등 유명 콘서트를 개최하고, '스톤뮤직', '하이어뮤직', 'AOMG' 등 장르를 대표하는 기획사를 소유했다. 또한 한국 최초로 인터넷 방송인을 관리하는 MCN 'DIA TV'를 창설했으며 OTT서비스 'TVING'을 소유하는 등
CJ는 대한민국 모든 문화산업에 손을 뻗치고 있으며 어느 기업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물론 한 기업이 가진 너무 거대한 영향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으나 CJ가 문화계에서 해낸 성과들이 빛을 잃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일은 CJ에서 제작한 콘텐츠들이 이제는 '한류'를 이끄는 주역으로서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한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도 언급한 <더 글로리>, <스위트홈>, <미스터 선샤인> 등의 훌륭한 수준의 드라마는
넷플릭스 등의 OTT 서비스에서 세계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CJ 엔터테인먼트에서 제공한 <기생충>은 아카데미상을 석권하며 한국영화의 가치를 세계에 알렸다.
이렇게 CJ가 문화산업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사업을 확장한 이유는
CJ의 경영진들이 문화산업이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그에 대한 큰 비전을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얘기는 세계적 대기업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한국이 완전한 폐허였던 한국전쟁 직후부터 사업을 꾸려
현재의 삼성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그런 그의 신념 중 하나는
'문화가 없으면 나라가 없다'로 문화의 힘을 이해하고 한국의 문화를 보존하고자 하였다.
그의 뜻은 손자인 이재현 CJ 그룹 회장에게까지 이어졌고, 이 회장은
제일제당(CJ)가 모기업 삼성으로부터 독립한 후 종합식품기업이었던
제일제당을 문화창조기업으로 바꾸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기존 식품산업에만 집중했던
제일제당의 사업구조에 '미디어&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신설한다.
이를 위해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과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드림웍스'를 합작했고
영상소프트웨어산업 진출을 천명하며 현재의 선진적 콘텐츠 개발의 기틀을 닦았다.
CJ가 문화산업을 발달시키는 목표를 진심으로 이루고 싶었다는 것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의 행보에서도 드러난다.
당시 모기업이었던 삼성마저 수익이 잘 나지 않는 문화사업에서 철수하고 있었지만
한국영화산업을 위해 최초로 멀티플렉스 영화산업을 시작하는 등 투자를 이어갔다.
이에 힘입어 한국영화는 21세기에 들어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의 꿈은
'전 세계인이 매년 두 세편의 한국영화를 보고, 매월 한 두번 한국음식을 먹고,
매주 한두 편의 한국드라마를 시청하고, 매일 한두 곡의 한국노래를 듣는 것'이었다.
일상 전반에 걸쳐 한국의 문화를 세계인이 소비했으면 좋겠다는 이 회장의 꿈은
놀랍게도 지금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한국은 이제 전세계가 인정하는 문화콘텐츠 강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에 CJ는 정말 큰 역할을 하며 현재까지도 한국문화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세계에 알리고 있다.
이병철 삼성 선대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전세계에 한국문화를 알리고, 그들이 한국문화를 소비하게 하겠다'는
당시로서는 말도 안되는 원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를 현실로 이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한 브랜드의 강력한 목표가 국가의 위상까지 올려놓은 CJ의 문화산업에서의 사례는
실로 브랜딩에서의 원대하고 구체적인 목표설정의 중요함을 알려주는 듯 하다.
제작/기획: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글쓴이: YEDO Teaching Artist. SE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