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엮이고 엮인 가족의 역사, 피지컬씨어터 <Birth>

우란문화재단 <Birth>




엮이고 엮인 가족의 역사, 피지컬씨어터 <Birth>


영국의 신체극 극단 ‘Theatre Re’는 피지컬씨어터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통해 처음 국내에 소개되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조기 치매에 걸린 한 남자가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과거의 소중했던 흔적을 따라가는 이야기로, 2019년 내한 공연, 2022년 국내 배우들의 라이센스 공연이 진행되었으며, 올해 12월 라이센스 공연이 재공연될 예정이다. ‘Theatre Re’의 극단명은 ‘다시 발견하다’, ‘다시 이미지화하다’, ‘이미 존재하는 것에 새로운 삶을 불어넣다’ 등의 ‘re’를 의미한다. 연약한 인간의 상태를 마임, 연극, 라이브 음악 등을 활용한 강렬한 몸의 움직임으로 시적이고 부드럽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신체의 움직임을 기반으로 한 연극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Theatre Re’의 새로운 작품 은 3대에 걸친 상실과 사랑, 가족의 의미, 삶의 여정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총 9번의 공연으로 한국의 관객들을 만났으며,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극장 안에서 모든 것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란문화재단 <Birth




거대한 천 안에 담긴 이야기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활용되는 것은 거대한 천이다. 천이 무대 전체를 감싸면 가족의 시간이 변화하고, 아픔을 극복하고, 가장 강렬했던 순간으로 이동한다. 공연 시작 전, 관객들은 로비에 있는 포토존에 실을 묶을 수 있다. 매 회차마다 관객들이 묶어놓은 실들이 합쳐지며 ‘BIRTH’라는 글자가 점점 뚜렷해진다. 직접 잘라서 묶은 실은 무대 위에 있는 거대한 천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로비에 나와서 다시 포토존을 바라보았을 때 3대에 걸친 가족의 이야기의 시작을 온전히 함께한 기분이 들었다. 인연의 실들이 모여서 만들어 낸 거대한 천과 같은 존재인 가족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절망스러울 때도, 언제나 함께하는 존재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분리될 수 없도록 엮이고 엮인 이들의 관계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저 서로를 향해 온 맘 다해 응원하고, 사랑하고, 고통을 이겨내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냥 살아가는 이야기를 통해 그려냈다. 이런 모든 것을 거대한 천을 통해 표현한 것이 인상 깊었는데, 천이 무대를 감싸는 순간 천 아래에서 일어나는 퀵체인지는 정말 마법 같았다. 천은 임신을 한 에밀리의 뱃속이 되기도 하고, 만날 수 없는 존재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는 환상 속 공간이 되기도 한다. 무대 위에서 거침없이 마법의 순간들을 보여주는 이 천 자체가 어떠한 언어로도 ‘가족’이라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공연 전 나누어주는 제작진의 인터뷰가 담긴 미니 프로그램북에는 천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다. 각자가 느끼는 천이 가진 의미를 찾는 것 역시 작품을 관람하는 포인트가 될 것 같다.




우란문화재단 <Birth> 




나와 엄마와 할머니


이 이야기는 임신한 에밀리가 할머니의 일기장을 열어보며 시작된다. 일기장 안에는 엄마의 어린 시절부터 결혼을 하고, 자라나는 모든 과정들이 녹여져 있다. ‘기억은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우리와 선조들의 삶의 유사성과 무의식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어떠한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심리 계보학’이라는 개념을 계기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에 일기장을 펼쳐 과거를 바라보는 ‘에밀리’와 엄마 ‘캐서린’, 할머니 ‘수’의 관계성은 작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세 사람의 관계에서 반복되는 여러 가지 사건들은 사실 관객들 역시 경험했던, 경험하고 있는, 경험할 보편적인 이야기이기에 단지 관객의 입장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가 되기도 하며 공연을 느낄 수 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에밀리가 임신을 했을 때 가족 모두가 ‘Go, Emily’를 외치며 응원을 해주고, 에밀리가 무대를 달리기하듯 뛰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보여주는 가족의 모습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가족의 형태 그 자체라 생각한다. 그 무엇이든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앞으로 나아가길 간절히 바랄 수 있는 존재 말이다. 하지만 에밀리는 뱃속에 담긴 아기, 제이크를 유산하고 만다. 아이를 잃고 절망에 빠진 에밀리에게 엄마는 찢어진 할머니의 일기장을 보여준다. 그 안에는 엄마 역시 아이를 잃었던 적이 있었으며, 그 시기의 딸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담겨있었다. 찢어진 페이지의 조각들이 맞추어지며 에밀리는 엄마와 돌아가신 할머니로부터 응원받는다. 세 사람이 서로의 손을 잡고 서로를 안아주는데, 서로가 엮이고 엮이는 것 같이 보이는 움직임이 인상적이었다. 에밀리는 이 응원을 통해 일어서고, 환상 속에서 만난 제이크와 웃으며 이별하며 삶을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된 에밀리의 순간들 위에 거대한 천이 다시 한번 펄럭이는데, 그 천을 움직이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엄마와 할머니이다. 가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만, 피지컬씨어터 <Brith>는 가족이란 관계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답고, 견고하게 연결된 관계인지를 온몸으로 표현하여 말과 글이 아닌 심장을 통해 느끼게 해준다. 


 

*심리 계보학: 특정 사건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해결되지 않은 감정적 체계가 무의식적으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되는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



우란문화재단 <Birth>






글: 예술도서관 에디터 리니


예술도서관 아카데미 3기 졸업생 리니는 지난 3년 동안 300회가 넘는 관극을 하며 예술의 힘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다. 짧게는 90분, 길게는 약 180분 동안 무대 위에 펼쳐지는 세계가 위로가 되고, 용기와 힘을 주는 과정을 보면서 누군가에게는 그냥 흘러가는 시간일지 모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시간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작품을 보고 친구가 해줬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만약 이 작품이 흥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라도 변화시켰다면 성공한거다. 나를 변화시켜주었기에 이 작품은 성공한 작품이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삶의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알리고 싶고, 더 나아가 그런 작품을 만드는 것이 삶의 목표이다. 한 작품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이야말로 성공한 창작자라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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