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
뮤지컬 <쇼맨: 어느 독재자의 네 번째 대역 배우>는 2022 헬로 정동 시리즈 공연으로 제작된 국립정동극장 자체 기획 창작 뮤지컬이다. 뮤지컬 <여신님이 보고계셔>와 <레드북>으로 유명한 한정석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가, ‘한이박’ 트리오가 다시 만나 만든 작품으로, 독재자의 대역으로 살며 가짜 인생을 살아야 했던 ‘네불라’와 한 번도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주변인들에게 이름조차 잘못 불리는 한국계 입양아 ‘수아’가 만나 서로를 마주하는 이야기이다. 작년 초연 후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대상, 극본상, 남자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DIMF 어워즈’에서도 심사위원상, 아성크리에이터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웰메이드 창작 뮤지컬로 이름을 알렸다. 1년 만에 정동극장에 돌아온 <쇼맨>은 오로지 작품에 대한 입소문으로 초연보다 더 많은 관객들이 극장을 찾고 있다.
‘인생은 내 키만큼 깊은 바다’라는 대사와 함께 극이 시작한다. 더도 덜도 아닌 딱 키만큼 깊은 바다에서 숨 한 번을 쉬기 위해 헤엄칠 줄 모르고 계속 뛰어오르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담고 있는 넘버이다. 이 곡은 극의 처음과 마지막에 나오는데, 처음에는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네불라와 그것을 바라보는 수아 두 사람만 등장하지만, 마지막에 리프라이즈 되어 다시 나올 때는 네불라와 네 명의 코러스 모두가 등장해서 함께 넘버를 부르고, 그것을 바라보던 수아 역시 함께 부르며 가사의 의미를 모두에게 확장시킨다. 쇼맨은 네불라라는 인물이 겪은 기괴하고 끔찍한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객 모두가 무대 위에서 그의 생애를 촬영하고, 네불라로부터 ‘인생을 판단해 달라’는 질문을 받는 수아가 되어 스스로를 마주하며 키만큼 깊은 바다에서 뛰어올라 숨 한 번을 쉬도록 만드는 작품이다. 먼 곳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던 이야기는 점점 거센 파도가 되어 관객 모두를 덮친다. <쇼맨>은 이러한 이야기이다.
네불라는 파라디수스의 독재자 미토스의 네 번째 대역으로 살았던 일을 자신의 가장 빛났던 순간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혐오한다. 배우였지만 누군가를 따라 하는 것 밖에 하지 못했던 그는 독재자의 대역을 뽑는 오디션에 합격하여 '차량 유세'라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지만, 자신이 했던 일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던 독재자를 위한 일이었다는 것을 혁명 끝에 미토스가 자살한 이후에서야 알게 된다. 사실 그는 이 일을 즐겼다. 넘버 ‘이것은 쇼’에서 ‘모두들 나를 감상하여라’라는 가사와 반대로 조명은 그를 비추지 않는 것처럼 그 누구도 네불라를 네불라로 봐주지 않았지만, 그는 모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외면했던 것이고, 외면했던 것을 제대로 바라보며 죄책감에 빠진다. 징역을 받고 출소한 후 미국으로 넘어와 살던 중 우연히 다시 무대에 서게 되고 기괴한 방법으로 미토스가 자살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보여주는 쇼를 벌이며 한 번도 할 수 없었던 진짜 연기를 할 수 있게 된다. 네불라는 모든 이야기를 수아에게 들려주며 자신의 인생을 판단해 달라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나를 판단해 줘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나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내가 너무 싫은데, 싫어하고 싶지 않아요. 나 열심히 살았어요. 요령도 안 피웠고, 부도덕한 마음도 없었어요. 기부도 많이 했어요. 생활비랑 이 촬영비만 빼면 다 한 거나 다름이 없어요. 그런데도 내가 싫어요. 내가 그 사람을 대신했다는 게. 그게 나한테 가장 소중하다는 게.’
수아는 유원지에서 촬영을 하던 중 우연히 네불라를 만나고, 그녀를 사진작가로 오해한 그로부터 촬영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을 온 수아는 사실 자신이 장애인 동생 제인의 보모 역할로 입양을 왔다는 것을 깨닫고, 집을 나와 마트 직원으로 일을 한다. 마트에서는 사고를 당한 매니저의 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수아를 ‘수아’라고 부르는 사람은 네불라와 동생 제인 밖에 없다. 어느 곳에서도 수아로써 살지 못하고 과거를 뒤로한 채 점점 어디론가 도망가려 한다. 가장 현실과 가까운 마트에서 일을 하며 현실에서 도망치고자 했던 그녀는 어쩌면 가장 비현실적인 일을 겪은 네불라를 통해 스스로를 마주하게 된다.
‘수아 씨는 그런 기억 없어요? 끝이 안 좋았어도 나쁜 것들이 섞여있어도 그 순간만큼은 너무 소중해서 버릴 수가 없는 기억.’
본인을 판단해 달라는 네불라의 부탁에 수아는 별 생각 안 한다고 대답하며 회피한다. 그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그녀가 그토록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을 마주하는 일이기 때문에, 동시에 스스로를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 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네불라에게 어떠한 정답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그에게 그의 인생을 담은 사진을 돌려주며 모든 것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도록 한다. 죄책감 속에 끝없이 가라앉고 있던 네불라에게 딱 한 번의 숨을 불어넣어 주며 수아 역시 다시 한번 과거의 아픔이었던 동생을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사회 속의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연결과 우리와 다르지 않은 수아라는 인물의 나아감과 성장은 우리 마음속으로 성큼성큼 다가와 위로를 전달해 준다.
과거의 상처와 아픔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여전히 그 안에 살고 있는 네불라와 수아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도망침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지 못했던 네불라를 통해 수아는 그럴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오리지널의 대역'이 아닌 ‘오리지널'이 될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그녀는 대역으로의 기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네불라에게 오리지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트라우마였던 동생 제인을 만난 수아가 오리지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또다시 끝없는 발버둥을 쳐야 하겠지만, 그 발버둥이 틀린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에 그녀는 나아갈 것이다. 그녀의 나아감과 함께 작품을 바라본 우리 역시 나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