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정의를 내리다-<2020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전시감상

예술에 정의를 내리다 - <2020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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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의 들판 위에 놓여 있는 조각상. 이 조각은 나에게 커튼 모양 같기도 하다. 하지만 돌로 된 조각이 왜 들판 위에 놓여있을까? 한 그루의 나무와, 크기를 가늠할 수조차 없는 돌 조각이 그린 작품의 이름은 왜 <인간혐오>인가?


어느 한 구석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림의 연속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의 이야기이다. 창작자의 설명보다는 관람자 나름의 서사로 완성되는 작품의 연속이었다. 그도 그런 것이, 모든 작품이 작품으로 전시되기 전, ‘제목’으로 귀결되는 르네 마그리트의 예술관을 담은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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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그림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닌 작품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제목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는 이 대사에서 알 수 있었다. 관람자들이 작품의 색채, 구성, 분위기만 보고 넘기는 것이 아닌, 하나하나의 이유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밖에 없게 만들겠다는 선전포고였다. 그래서일까, 그리 많지 않은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걸음을 떼는 사람들의 속도가 현저히 느리게 느껴졌다.



전시의 시작은 그의 생애였다. 어린 시절, 강에 뛰어들어 자살한 어머니와 그럼에도 사랑하는 아내를 맞이하고, 미술, 나아가 예술에 대해 고민하고 부딪히고 쓰러졌던 그의 삶이 먼저 다가온다. 학창시절 초현실주의라는 교양 있는 단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미 벌어진 일들, 세상에 낭자한 수많은 이름들을 한 번 더 건드리면서 현실을 현실이 아닌 것처럼 프레임 안에 내놓는다. 각종 사물, 색채, 구도들이 가로막았으나 모든 그림은 그의 삶이었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이름만 겨우 아는 이 작가의 삶을 몇 차례고 되뇌이게 된 점에서 이 부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이것이 곧 초현실주의의 궁극적인 가치가 되지 않을까.



각각의 작품은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림이 예쁘다, 분위기 좋다, 유명한 그림인데, 하는 원론적인 생각에 그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삶에 개인의 삶이 더해지면 그림 하나에서 시작된 수많은 이야기가 이어지게 된다. 커봐야 사람의 몸으로 얼추 가려질만한 크기의 그림에서 말이다.



끊어질 듯 끊이지 않는 그림들의 끝에는 낯설도록 큰 공간이 자리한다. 바닥까지 가득 메운 스크린에는 여태 눈에 꾹꾹 담으려 노력했던 그림들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살면서 몇 번이나 들어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진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였다. 세상이 변하고, 그 속에 담긴 것들은 더욱 빠르게 변한다는 말이 있다. 누군가의 삶을, 그 속에 담긴 끝없는 의문들을 오늘의 방식대로 해석하려 노력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공간이었다.



미술은 여전히 내게 어렵다. 제법 친절한 방식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전시였음에도 이 마음은 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간을 가득 메운 누군가의 이야기는 늘 나를 환기시키며, 프레임 밖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작가의 이야기는 내 일상의 일부에서 떠오른다. 멈추지 않는 동화처럼 말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질문은 한 번쯤 꼭 들어봤을 법하다. 삶의 순환이라는 점에서 가지는 의문은 예술이라는 것을 정의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이미지를 해석하고, 언어로 소통한 뒤, 또 이를 이미지로 기억한다. 그렇다면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 있는 수많은 작품들은 우리에게 언어인가, 혹은 이미지인가?






제작/글: 예술도서관TA 서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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