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 씹은 얼굴로 회의하길 좋아하는 시체들에게’
예술경영자의 눈으로 본 연극 ‘영지’
‘똥 씹은 얼굴로 회의하길 좋아하는 시체들에게’
“‘네 스스로가 가장 중요해’라고 말해주는 연극. 우리를 이해해 준 연극” - 2019 <영지> 관람후기 중
“자, 여러분. 여러분들도 이제 4학년으로써 고학년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시체가 잘 되어가고 있죠? 시체는 유치원 때부터 되는 것이 좋습니다. 자, 이제 한 명씩 관에 들어가세요! 선행학습 덕분에 아주 순순히 관에 들어가는군요”
20세기 회화의 거장 피카소는 ‘모든 아이들은 예술가로 태어난다’고 이야기했다. 아이 한 명 한 명에게는 각각 다른 개성과 잠재력이 있다는 의미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 초등학교에 입학한다. 영어학원, 수학학원, 미술학원 등 여러 학원을 쳇바퀴 도는 삶이 시작된다. 중학교를 지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명문대학을 위한 싸움을 한다. 대학에 가면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직장에 가면 승진을 위해, 모두가 똑같은 목표를 위해 똑같은 길을 달려간다. 그렇게 자유로운 예술가로 태어난 아이들은 무색무취의 공산품으로 개조당한다.
영지는 회색빛 병목안 마을에서 ‘마녀’로 낙인 찍힌 11살 아이다. 어른들은 유독 튀는 영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의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고 삐뚤어졌다며 수군댄다.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 않는 영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배제해버린다. 그들에게 영지는 위험한 대상이다.
“뜯어내자 뜯어내자 심장을 뜯어내자”
영지가 외웠던 이 주문은 어른들이 영지에게 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심장을 뜯어내자’고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영지를 향한 손가락질과 ‘~해야 한다’는 어른들의 요구는 영지에게 ‘심장을 뜯어내자’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영지는 고유한 색깔을 봐주지 않고, 전부 똑같은 색으로 덮어버린다는 건 심장을 뜯어내어 시체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렇게 사는 건 관 속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일과 같다고.
영지의 독백을 듣다 보니 이 사회가 좀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하지 못하고 감정과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좀비가 또 다른 좀비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같은 시체가 아니면 심장을 뜯어내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겁이 들었다. 혹시 나도 다른 누군가의 심장을 뜯어내지는 않았을까. 나도 사실은 관속에 누워있는 시체가 아닐까.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나는 어른들이 싫어하는 예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른들이 싫어한다는 건 그들과 같지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거슬리고 튀는 걸 싫어하니까.
“나는 물 속에 있는 걸 좋아해. 잠수를 하면 바깥이 꿈처럼 느껴져. 인어가 되고 싶어. 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몰라, 그래서 좋아. 우주에 흩어진 나는 언제 다 찾을 수 있을까. 다 찾는다면 사는 이유는 사라지겠지. 그래도 나는 찾을래. 나는 점점 더 비뚤어져. 기우뚱 기우뚱 기우뚱. 어떤게 진짜 똑바로 인지 모르겠어. 그런 게 있기는 할까?”
예술을 한다는 건 천덕꾸러기가 되겠다는 말과 같다. 우리 사회에서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달고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예술이란 것은 비생산적이며,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신선놀음과도 같은 것이니까.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에게 있어 예술은 나를 알아가는 과정인 동시에 나를 표현하는 수단인 것을.
예술대학 입시를 준비하면서, 예술대학을 다니면서 부모님이나 지인들이 예술을 반대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았다.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심장을 뜯어내지 못해 안달 나 있을까. 내 심장이 뜯겨졌으니 너도 뜯겨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들의 압박을 이겨내고 꿋꿋하게 예술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몰려드는 시체들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또 다른 시체가 되어 관속으로 들어간다. 나의 반항도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 심장이 뜯긴 채로 시체처럼 관에 누워있을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관에 누워서 헐떡대고 있지는 않을까 두렵다. 아니, 어쩌면 이미 심장은 뜯겨졌지만 살아있는 인간이 부러워 심장이 붙어있는 척하며 돌아다니는 시체가 아닐까. 나는 영지와 친구들이 울부짖으며 부르는 ‘네모의 꿈’ 가사 속의 ‘동그라미가 되고 싶은 네모’일지도 모른다.
“물구나무를 서면 다른 세계가 보여. 또 다른 세계. 나 거기로 가고 싶어. 병목안 너무 답답해”
영지는 시체가 되어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행복하니?’, ‘너는 뭘 하고 싶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있니?’ 시체로 사는 것이 행복하다면 그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시체로 사는 것이 답답하다면, 마음 한구석에서 갈증을 느끼고 있다면 관을 열고 물구나무를 서자.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를 다르게 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남들이 원하는 나의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중요하다. 부모님이 원하는 길을 걸어가기보다 내가 가고 싶은 길을 밟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다. 인생은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지금부터 환생 식을 하는 거야. 모두가 다시 태어나는 거지. 새로운 세계”
더 이상 시체로 살지 말자. 주어진 것에 순응하며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자. 나에 대한 탐구를 지속하고, 내 안의 생각과 감정에 집중하자. 다름을 배척하는 사회에 굴복하지 말고 자신만의 색을 유지하는 데 힘쓰자. 수군대는 이들의 말은 흘려듣고 나의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하자. 모두에게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이 있으니 그에 맞춰 성실하게 걸어가자. 더 크고 튼튼한 폐와 심장을 불러오자. 시체를 벗어나려는 우리에게 영지가 주문을 걸어준다.
‘불러오자 불러오자 심장을 불러오자... 모두 환생!’
제작/글: 예술도서관TA 이안